海南(해남) 恭齋 尹斗緖古宅(공재 윤두서고택)

2016. 1. 15. 06:22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72
중요민속자료 제 232호

 

 

[고택으로 가는 골목길]


尹斗緖(윤두서, 1668-1715) 본관은 海南(해남)

자는 孝諺(효언) 호는 恭齋(공재)이며, 조선 중기와 후기

변환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선비 화가로 孤山(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

 

 

[고택으로 가는 골목길 2]


그는 장남인 덕희와 손자인 용도 畵業(화업)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정을 이루었는데, 시서화 음악 공예 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지리 천문 수학 등 폭넓은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으며, 謙齎 鄭敾(겸재 정선)
玄齎 沈師正(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후기 '三齋(삼재)'로 꼽히는 화가이다.

 

 

[사랑채와 곳간채]


학문에 정진하던 윤두서는 15세에 전주 李氏(이씨)와 결혼

남인계열이었던 그는 나이 25세에(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안내판]

 

[사랑채 전경]


그 당시 西人(서인)이 得勢(득세)하고 있어 南人(남인)계열의
해남 윤씨에게는 뜻을 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직의 뜻을 버리고
친구들과 학문에 열중하며 시서화 등 다양한 識見(식견)을 넓혔다.


그는 1712년 이후 만년까지 해남 연동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죽은 뒤 영조 50년(1774)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노거수와 곳간채]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며,
해남에 있는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自畵像(자화상)'이 대표작으로 지목된다.
해남의 종가에는 '자화상'외에도 그의 유묵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유작들은 보물 제 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恭齋 尹斗緖古宅(공재 윤두서고택)]
 
종가 소장 유작들 가운데에는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旋車圖(선차도)' 와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採艾圖(채애도)'
풍속화가 포함되어 주목된다.

이런 화풍은 김홍도 등에 의하여 유행한 18세기 중, 후반의
풍속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안채 전경]


조선시대 자화상 혹은 초상화 가운데 가장 강렬한, 또 어떻게 보면
가장 섬뜩한 인상을 남긴 자화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자화상 속에 나타난 윤두서의 기개는 어쩌면 호랑이의 그것과 닮아 있다.
조선시대 선비의 자화상이라 하기에는 파격적이고 직설적인 표현,
그것은 있는 그대로 윤두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안채]


윤두서는 모든 인간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 종일 관찰한 뒤에야
비로소 그려, 그의 그림은 사실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정신의 표현까지 이르고 있다.


白馬圖(백마도, 보물 제481호)는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정지된 상태에서 뒷다리는 살짝 들어올리는 조그만 변화로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두 여인'은 자화상에 다음가는 작품으로 그 역시 높은 수준의 작품이다.

 

 

[恭齋 尹斗緖古宅(공재 윤두서고택)]


윤선도가 풍수지리상 명당터에 이 집을 지었으나,
바닷바람이 심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증손인 윤두서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지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현종 11년(1670)에 지어 후에
윤두서가 살게 되었고 순조 11년(1811)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고택 안채 앞 동백]


지을 당시에는 문간채와 사랑채 등 48칸 규모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와 곳간채, 헛간, 사당만이 남아있다.


'ㄷ'자형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人(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고,
동쪽 광의 남측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지붕이다.

 

 

[곳간채와 사당 전경]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을 조성하였다.


문인화가의 옛집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수법이 잘 남아있는
유서깊은 전통주택이며, 인근마을에 해남 윤씨의 기와집
10세대가 있어 더욱 옛스러운 정취를 풍기고 있다.

 

 

[사당]


그의 유품에는 중국 '南宗文人畵風(남종문인화풍)' 의 수용에
중요한 지침서인 '顧氏歷代名畵譜(고씨역대명화보)'도 끼어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과 접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 실제 종가 소장의 화첩에는
남종화풍의 산수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고택 골목길 담벼락의 담쟁이]


그의 회화는 중국적이거나 전통성이 강하지만 18세기 중, 후반
이후 의 화단을 풍미한 '南宗畵風(남종화풍)'과 '風俗畵(풍속화)'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있기도 하다.

 

 

[恭齋 尹斗緖(공재 윤두서) 묘소 전경]


집 뒤로 돌아가면 恭齋 尹斗緖(공재 윤두서) 묘소가 있다.

 

 

[恭齋 尹斗緖(공재 윤두서) 묘]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에게 계승되었으며,
조선 말기의 許鍊(허련, 1809~1892)도 해남의 종가인 綠雨堂(녹우당)에 와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전통화풍을 익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