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시인 金南柱(김남주) 생가를 찾아

2016. 1. 12. 06:39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삼산면 봉학리

 

 

[金南柱(김남주) 생가 전경]


金南柱(김남주, 1945~1994)는 아버지 김봉수. 어머니 문일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戰士(전사) 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시인'이다.

또한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혁명 시인이었다.

 

 

[金南柱(김남주) 생가 전경]


삼화초등학교, 해남중을 거쳐 광주일고에 입학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 자퇴하였고 이후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중 '3선개헌반대 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과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고발'을 제작. 배포하여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이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金南柱(김남주) 생가]


1974년 '창작과 비평''진혼가' 등으로 문단에 나온 이후
작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 연구소' 등을 결성하기도 했다.


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

'전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동지들과 함께 체포. 구속되었으며,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에서 복역했다.

 

 

[金南柱(김남주) 약력 碑(비)]

 

[金南柱(김남주) 약력]

 

[안내글]

 

[노래 詩碑(시비)]


1977년 발표된 고 김남주의 시 '노래' 전문이다.
고인은 암울했던 시절, 시대를 밝혔던 횃불이자 투철한 전사였으며,
신념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던 실천적 지식인이고 시인이었다.

 

노래 /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靑松綠竹(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시인 金南柱(김남주) 흉상]

 

[안채]


김남주 생가에 들렸을 때 마침 초가지붕 이엉올리는 날이었다.
요즘 쉽게 접할 수 없는 광경이여서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눈길을 떼지 못했다.

 

 

[문간채]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0년 세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가 남긴 470여편의 시 가운데 300여 편이 옥중에서 쓴 시이며,
그의 옥중시는 80년대 한국시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

 

 

[詩碑(시비)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쪽 전경]


1988년 1월 가석방 되어 출소한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단재상. 윤상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작고 이후에 민족예술상이 수여되었다.

 

 

[詩碑(시비) 사랑은. 자유]

 

[사랑은. 자유 전문]


홍안의 청춘으로 만나 철창의 안과 밖에서 안타까운 사랑을
나누던 세월이 10년. 어느덧 반백의 중년이 된 시인 김남주와 朴光淑(박광숙)은
1989년 1. 29 광주 문빈정사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출감할 때까지 박씨는 감옥 밖에서 김씨의 아내 역할을 해 왔으며,
한 달에 고작 두어 번 정도 면회를 하면서 유지해 온 이들의 사랑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김남주 시인의 옥중시 중 하나인 序詩(서시) '사랑은'에서
단편적이나마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감옥 체험실 전경]

 

[감옥 체험실 안내글]

 

[조형물과 새겨진 詩(시) 조국은 하나다.]


조형물에 새겨진 고인의 시 '조국은 하나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권력의 눈 앞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나는 이제 쓰리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오르막길 위에도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사나운 파도의 뱃길 위에도 쓰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리라
밤길 위에도 쓰고 새벽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나는 이제 쓰리라
인간의 눈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맨 처음 보게 되는 천장 위에 쓰리라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밥 위에 쓰리라
쌀밥 위에도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이 쓰는 모든 말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탄생의 말 응아 위에 쓰리라 갓난아기가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말 위에 쓰리라
저주의 말 위선의 말 공갈협박의 말...
신과 부자들의 말 위에도 쓰리라
악마가 남긴 최후의 유언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생략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詩碑(시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詩(시)]

 

[감옥체험실과 시비 공원 전경]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는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등이 있다.

 

 

[시인님과 함께]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유행의 의상걸치기에 급급해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나의 시가...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그의 시처럼 김남주의 시는 그가 함께 해야할 민중들의 삶속에서
등대처럼 반짝이는 현신타계의 힘이었던 것이다.

 

 

[시비공원에서 본 안채 전경]


80년대 민주화 투쟁에서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누구보다도 시가 무기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그였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이었다. 투쟁적인 구호였다.

 

 

[장독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아니 요즘엔 그보다 훨씬 빨리 변해간다고 하는데,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도 넘었건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곳곳에서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흉상에서 내려다 본 생가 전경]


스스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라고 칭했듯이
그의 시는 강렬함과 전투적인 이미지들이 주조를 이룬다.

 

 

[문간채]


기념사업회는 고인의 생가 터에 당시 안채와 사랑채 초가를
복원하였으며, 시인의 흉상과 시비를 세웠다.


흉상은 조각가 김기범 씨가 만들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인 '이 두메는 날라와'로 시작되는
'노래' 전문을 새겼으며, 민주화운동의 한 획을 그었던 그의 시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