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津(강진) 永郞生家(영랑생가)

2016. 1. 11. 06:59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
전라남도 기념물 제 87호
중요민속자료 제 252호

 

 

[영랑생가 안내팻말]

 

[향토문화관 현판]

 

[향토문화관 전경]


영랑 생가 입구 주차장 옆에 있는 건물로 이곳은 한국 시문학파의 거성
영랑 김윤식, 김현구 시인의 작품과 향토작가들의 주옥같은 시와
작품 세계를 감상하실 수 있는 곳이다.

 

 

[탑골샘 현판]

 

[탑골샘 전경]


향토 문화관을 지나 생가로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초가지붕을 한 탑골샘이 정겹다.
이 샘은 도르래를 이용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

 

 

[영랑 생가 사립문과 안내판]


대나무로 엮은 열린 사립문을 들어서면 영랑생가다.
영랑생가는 지방기념물 제89호로 관리되어오다
2007년 10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2호로 지정되었다.

 

 

[안내도와 안내판 글 내용]

 

[생가 안쪽 돌담 아래 詩碑(시비)와 안내판]

 

[영랑 김윤식 생가 표석비]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詩碑(시비)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생가 행랑채 전경]


永郞(영랑) 金允植(김윤식, 1903-1950)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金鐘湖(김종호)와 어머니 金敬武(김경무)

사이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아호인데 문단 활동 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하였다.

 

 

[詩碑(시비)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 한편의 詩(시)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시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거나 '문학의 꿈'을 갖게 했다.


가슴 설레던 사춘기 시절에 접했던

'모란이 피기까지는' 지금도 읽어내려가면

어느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행랑채 대문에서 본 생가]


영랑은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강진보통학교를 다니며 13세에 결혼을 하였으나

1년 만에 사별하였으며,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 후

1917년 희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유학중 무정부주의 혁명가인 박열과 사귀었고

괴테, 키츠 등의 외국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고향에 머물면서 1925년 김귀련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생가 안채]


한국 초창기 문단의 거성 모란의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난 생가이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동지에 시(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며 화려하게 등단함)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除夜(제야)'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詩作(시작) 활동을 전개.
이어 '내 마음 아실 이','가늘한 내음'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 무렵에 쓴 시이다.

 

 

[안채 방안]


당시 사상성과 목적의식이 아닌

순수한 서정시를 발표함으로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었으며, 8.15해방 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35년 첫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안채 부엌]


부엌에는 예전에 사용하던

물건들이 놓여져 있어 정겨움을 더해준다.

 

 

[샘(우물)과 장독대]


영랑 선생과 가족이 사용하던 우물로 훼손되었던 것을
1993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으며 장독대 옆에는 1935년에 지은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이라는 시비가 세워져있다.

 

 

[詩碑(시비)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닫힌 우물곁에서 인증샷]

 

[생가 안채 전경]


해방 후에 시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때 포(유)탄에 맞아 그로 인해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생가 안채 앞에서 인증샷]

 

[사랑채 전경]


영랑은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사랑채]


방안에는 한복을 입은 영랑 선생이 책상에 앉아

책을 보는 모형이 놓여져 있으며, 앞마당에는 은행나무와 모란,

집 뒤로는 대나무와 동백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시인에게는 글감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생가 뒤쪽 동백과 대나무 숲]


1948년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남에게 팔았고 전매되면서
지붕이 시멘트 기와로 바뀌는 등 일부 변형되었으나 1985년 12월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전라남도 기념물 제 89호로 지정하고 1992년
지붕을 초가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詩碑(시비)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

 

[詩碑(시비)와 사랑채 전경]

 

[영랑공원 표석비]

 

[은행나무]


사랑채 앞마당에 당당히 서있는 은행나무
은행나무 아래에는 1938년 9월에 영랑선생의 '은행나무'라는 글이 적혀있다.

 

 

[은행나무 안내판 글 내용]

 

[배롱나무와 사랑채 전경]

 

[배롱나무쪽에서 담은 안채 전경]


아기자기 꾸며진 정원이 아름다웠고,
노거수 돈나무와 백일홍도 늠늠한 자태를 뽑내고 있었다.

 

 

[돈나무]


돈나무는 돈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 넓은잎나무이다.
남쪽 섬이나 바닷가에서 자라고 있으나 온실에 심으면
중부지방에서도 겨울을 날 수 있다.

 

 

[안채에서 본 행랑채]


행랑채 곳간에는 베를 짜는 베틀, 솜을 자아서 실을 만드는 물레,
가마니를 짜는 가마니틀, 탈곡기 등의 옛날 생활용품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맨 끝이 바로 뒷간(옛 변소)이다.

 

 

[행랑채에서 본 입구 전경]


생가내에는 시인의 詩碑(시비)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詩碑(시비)는 따로 한곳에 모아 詩(시) 향기에 올려놓겠습니다.
詩(시)를 통해 시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는것도 좋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