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8. 06:22ㆍ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423
경상북도 기념물 130호
[입구쪽에서 담은 설총 묘 전경]
보문동 진평왕릉 동쪽 마을내에 있는 묘.
신라 중대 문장가의 한사람인 薛聰(설총)의 무덤이라 전해내려오고 있다.
[설총 묘 입구와 안내판]
[안내판 글 내용]
[설총 묘 전경]
설총은 경전을 우리말로 해석한 한국 儒學(유학)의 할아버지,
또는 신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열 사람을 가리키는
'신라 十賢(십 현)' 가운데 한 분으로 일컬어진다.
* 儒學(유학) : 공자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유교의 학문
[薛聰(설총) 묘]
설총은 신라 경덕왕때의 대학자로서,
그의 아버지는 원효대사(617-686)이다.
원효와 설총 두 父子(부자)는
한민족의 정신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신라 10현 중 한 사람으로 향찰(이두문자)을 집대성한 설총.
또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문장으로 꼽히기도 한다.
일찍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은 그는 말년에 우주의 한소식을 깨닫고
후세인들을 위해 '薛聰秘訣(설총비결)'이라는 비결서를 남겼다.
[魂遊石(혼유석)]
탁상회의를 하듯 혼유석 주위를 의자처럼 둘러앉게 만든 혼유석.
다른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혼유석이 눈길을 끌었다.
[魂遊石(혼유석) 위에 살포시 앉아 참배하고 있는 새]
[묘비]
삼국유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원효 스님이 미친 척 거리를 다니면서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나에게 주겠는가?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내리라' 고 노래했다.
모두들 그 뜻을 알지 못했지만, 태종만은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현명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현인이 있으면 그 이로움이 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때 요석궁에 홀로된 공주가 있었다.
태종은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들이도록 했다.
관리는 원효를 만나자 함께 물 속에 넘어져 옷이 다 젖게 한 다음,
그를 궁 안으로 데려가 옷을 말리게 했다.
그래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을 낳았다.
이 전기를 통해 설총이 태어난 시기가 태종 무열 왕 때인
650년대 후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설총의 성장 기록은 거의 없다.
[우측에서 본 설총 묘]
삼국사기에는
'성품이 총명하고 예민해서 태어나면서부터 도리와 학술을 알았다.'고 했다.
그의 나이 30 대 전후인 신문 왕 때, 우리 문학사 최초의
假傳體(가전체) 작품인 '花王戒(화왕계)'를 남겼다.
* 假傳體(가전체) : 사물을 의인화하여 전기 형식으로 적은 문학 양식
[좌측에서 본 설총 묘]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을 간략하게 줄어서 옮겨봅니다.
화왕(임금꽃ㆍ모란꽃)을 정원에 심었더니, 한 봄 내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러자 온갖 고운 꽃들이 찾아와 임금꽃에게 잘 보이려고 야단들이었다.
이 때 홀연히 한 여인이 나타났다. 붉은 입술과 옥같이 흰 이에다 아름답게 장식한
옷을 입고 맵시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저는 눈같이 흰 모래를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대하고 봄비로 목욕해
때를 씻고 맑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지내니, 이름을 장미라고 하옵니다.
제가 임금님을 모실까 하오니, 저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 때 또 한 사내가 베옷에 띠를 두르고 흰 모자를 쓴 채
지팡이와 종을 들고 와서 허리를 구부리고 말했다.
"저는 백두옹(할미꽃)이라 합니다.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임금님도 그럴 뜻이 있으십니까?"
[薛聰(설총) 묘]
옆에서 누군가가 "어떤 쪽을 따르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임금꽃이 대답했다.
"사내의 말에도 이치가 있지만, 미인은 얻기가 어려우니 어쩌겠는가?"
그 말을 들은 사내가 나와 말했다.
"왕께서 총명하고 의리를 안다고 해서 왔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군요.
무릇 임금들은 아첨을 가까이하고, 정직을 멀리하지 않는 이가 드물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그러니 내 어찌하겠습니까?"
이에 임금꽃이 깨닫고, "내가 잘못했소."라고 빌었다.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설총이 신문 왕에게 들려 준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문 왕은 설총을 발탁해 높은 벼슬에 올렸다.
설총의 가장 큰 업적은, 신라에 한문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유교의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특히 이것은 신라 吏讀(이두)의 시초가 된다.
* 吏讀(이두) : 한자의 뜻과 새김을 빌어 우리말을 적던 표기 방식
[설총묘앞에서 인증샷]
[묘 뒤에서]
설총은 또 아버지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塑像(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는 효성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실천하는 유학자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 塑像(소상) : 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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