坡州鄕校(파주향교)

2015. 12. 11. 06:45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 335
파주시 향토유적 제2호

 

 

[파주향교 外三門(외삼문)]


향교는 옛날의 학교라 할 수 있다.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설립한 학교이니 私學(사학)인

서원과는 다른 공립학교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집권적 정치구조 위에서

전개된 것으로 郡縣制(군현제)와 함께 王京(왕경-수도)이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관학 교육기관이다.

 

파주의 鎭山(진산)이라 불리는 봉서산 자락에 위치한

坡州鄕校(파주향교) 이곳을 찾아가기는 그리 쉽지는 않다.

 

우선 동네에서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묻고 물어 파주읍사무소를 지나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산길로 죽 이어진 길이 아래까지 쭉 잇달아있고 그 밑으로 향교가 있었다.


향교가까이엔 가옥이 같이 붙어있고 바로 앞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외삼문 앞에선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지만, 담아오진 못하였다.
군부대가 인접해 있고 나무숲에 가려서...여러각도에서 찍어보았지만...
결국..실패...올리지 못하였습니다.

 

 

[明倫堂(명륜당)]


明倫堂(명륜당) 현판과 함께 옆 기둥에는...
坡州鄕校(파주향교) 儒道會坡州支部(유도회파주지부)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향교의 문은 닫혀있었고, 이번에도 담 밖에서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나보다
했는데, 마침 만난 주민에게 여쭈어보아 담장사이로 난 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 설립된 이 향교는 선현의 위패 봉안,

배향과 파주지역의 교육담당을 위해 건립되었으며,

현종1년(1660)에 사액되어 돈암서원 이라고 명명되었다.


파주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향교는 파주향교인데

파주의 鎭山(진산)이라 불리는 봉서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파주향교는 고려 충렬왕34년(1304) 봉서산 아래

舊(구)향교골에 건립하여 大成堂(대성당)이라 칭했던 것을

태조 7년(1398) 大成殿(대성전)을 창건하여 성현들을 봉안하였다고 전해진다.

 

 

[명륜당에서 담은 외삼문 전경]


그 후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대성전이 소실되었으나

즉시 복원치 못한채 인조8년(1630) 明倫堂(명륜당)과 東?(동무), 西?(서무),

內外三門(내외삼문), 紅箭門(홍살문), 東齋(동재), 西齋(서재), 祭器庫(제기고),

校直舍(교직사)등을 건립 하였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대성전은 인조 22년(1644)에 복원하니 소실 후 50여년만 이었다.
그 후에도 한국전쟁의 참화등으로 건물이 소실되어 여러차례의 복원과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동, 서무와 서재가 복원되지 않은채 대성전, 명륜당, 동재, 내, 외삼문, 교직사 등이 유지 보존되고 있다. 

1973년에는 홍살문을 보수하고 대성전을 새로 단청하였으며
1979년에 와서 명륜당, 내, 외삼문, 동재,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999년에는 명륜당을 새롭게 보수하였다. 

갑오개혁이후 교육적 기능은 약해지고 현재는

봄, 가을로 석전제를 봉행하고 초하루, 보름이 되면 분향을 한다.

 

 

[東齋(동재) 전경]


파주향교가 위치한 지역은 조선시대 坡州牧(파주목)으로 정3품 벼슬인
牧使(목사)가 관장의 책임을 맡는 향교 규모로는 가장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파주향교에는 중앙정부로부터 교육을 전담 할 敎授(교수-종6품) 1인과
訓導(훈도-종9품) 1인이 파견되었으며 학생의 정원도 가장 많은 9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적 기능이 상실되면서 현재는 주기능인 제향과

기타 향교 운영을 총괄하는 典敎(전교)와 掌儀(장의)직을 두어 향교일을 맡아하고 있다.


파주향교의 건물배치는 완만한 경사를 두고 前學後廟(전학후묘)의 형태를 띠는데
외삼문을 들어가면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재 건물이 위치해 있으며 명륜당 뒤로
내삼문 안에 대성전이 가장 상단에 위치해 있다.

 

 

[동재와 외삼문과 노거목]


현재 전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성전을

비롯하여 明倫堂(명륜당), 東齋(동재), 外三門(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五聖(5성), 宋朝二賢(송조2현),
우리 나라 十八賢(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파주향교 대성전 뜰에는 노거수인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각각 1그루씩 심어져
있으며 내삼문 안쪽 동서에 은행나무 2그루가 울창하게 자라 있다.


전국의 많은 향교의 뜰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향교의 가장 기념적이고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은행나무가 향교를 상징하는 이유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현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론하던 터에 제자들이 학문을 기념하기위해 은행나무를 심고
주위에 杏亶(杏亶(행단))을 쌓은것에서 유래 한다.


그 후 공자의 사상을 받드는 후예들이 뜰에 은행나무를 심어 그 뜻을 기렸다 한다.

 

 

[大成殿(대성전) 현판]

 

[문화재 자료 제 83호 大成殿(대성전) 전경]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역대 성현들에게 제향을 올리고

공자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여 주민을 교화시키는 곳으로 祭享空間(제향공간)인

大成殿(대성전)과 講學空間(강학공간)인 明倫堂(명륜당)과 東, 西齋(동, 서재)로 공간이 구분된다.


조선시대에 坡州牧(파주목)에 향교가 처음 설치된 것은

1398년으로 알려져 있고 세종(재위 1419∼1449)때에 중창했다고 한다.  

 

 

[대성전과 노거수]

 

전체적인 배치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뒤로 하여 내삼문과 종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前學後廟(전학후묘)의 공간구성을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를 가진 맞배지붕의 건물로서

2단의 장대석 기단위에 개방된 前退(전퇴)를 구성한 단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대성전에 중국5성현, 그 아래 동무에

공문10철과 송조6현을 그리고 서무에 우리나라 18현을 모셔왔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불에 탄 후 동무와 서무가 복원되지 못했으며 1984년

향교 유림회의를 거쳐 공문 10철과 송조 6현중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친 송조의 정호와 주희

두 분의 위패만을 모시고 그 외의 공문10철과 송조4현에 대해서는 埋安(매안)했다고 한다.


현재 파주향교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성현을 중앙에 모셨으며
동서벽에 한국의 18현과 宋朝(송조)의 程顥(정호)와 朱熹(주희)등 모두 25位(위)를 모셨다.

 

 

[대성전 옆 노거수(느티나무)]

 

[보호수 안내 글 내용]

 

[보호수(향나무) 전경]

 

[보호수 안내 글 내용]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가득 내려앉은 향교 뜰]

 

[은행나무가 전해주는 가을 향기]

 

나무는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의 마음을 먹고

자라며, 그 사람의 모습을 거울삼아 닮아가며 자란다 한다.


나무 한그루를 통하여 만나는 역사나 고택의 향기,
옛사람들의 올곧은 성품과 애환을 나무를 통해 알 아 봄도
뜻깊은 일이라 생각해 보았다.

 

 

[파주향교 이곳 저곳]

 

[안쪽에서 담은 외삼문 전경]

 

깊어가는 가을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어 황금물결이다.
바람이 불면 온통 노랗게 출렁이는 은행잎 울컥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눈부신 아름다움은 가끔은 눈물을 동반하기도 한다.

 

 

[주차장 쪽에서 바라본 파주향교 전체 전경]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후대에 물러주기 위하여선
나라를 지키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의 일정에 따라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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