彰節祠(창절사) 彰節書院(창절서원)

2015. 12. 10. 06:53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1

지정번호 : 제 27호

 

 

[彰節書院(창절서원)]

 

단종(재위 1452∼1455)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재위 1455∼1468)에 의해 죽음을 당한 死六臣(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와
절개를 지키던 10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숙종 11년(1685)에 홍만종의 건의로 지어졌으며,
사육신 외에도 엄흥도, 박심문 그리고 생육신 중 김시습과 남효온 등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영월읍 사무소에서 제천방향으로 약 50m 지점의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역시 굳게 닫힌 문.

담넘으로 사진만 담아 올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창절사 안내판 글 내용]

 

[拜鵑樓(배견루) 현판]

 

[拜鵑樓(배견루) 전경]

 

서원 앞 2층 누각은 배견루로 서원의 정문인듯...

 

 

[彰節書院(창절서원) 현판]

 

[彰節書院(창절서원)]

 

강원도에 있는 사당이나 서원 중 대문이 문루인 곳은 이곳 뿐이며,

창절사는 현재 남아있는 강원도 내의 사당이나 서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지어졌을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담너머로 담은 서원 내부]

 

숙종 11년(1685)에 강원도 관찰사 洪萬鍾(홍만종, 1643∼1725)이
단종의 祠宇(사우)가 협소함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증축을 간청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은 당시의 영월부사인 趙爾翰(조이한)으로

하여금 사우 옆에 따로 사육신사를 세우게 하였으며,

그 현판은 宋詩烈(송시열, 1607∼1689)이 썼다.


숙종 25년(1699) 3월에 단종이 복위됨에 따라

장릉 경내에 육신사우가 있다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숙종 31년(1705)에 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숙종 35년(1709)에는 영월 유생 엄야영 등의

소청에 따라 '彰節祠(창절사)'라는 賜額(사액)을

내리게 되었고 이 현판을 權尙夏(권상하, 1641∼1721)가 썼다.

 

정조 12년(1788)에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창절사를 둘러보고 강당과 배견루가 허물어질 염려가 있어

이의 보수를 주청하자 정조가 허락하였으며, 친히 제문까지 지어 주었다.

 

이때 嚴興道(엄흥도)의 정려각도 함께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서원 담 옆 화단에 핀 꽃]

 

창절서원은 1892년부터 1898년까지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수되었으며,
배견루는 박심문의 후손인 朴敎默(박교묵)이 宗中(종중)의 협조로 이룩하였다고 한다.

 

그 현판은 한국전쟁 때 없어져 1964년에 새로 쓴 것이 걸려 있다.

 

 

[담 너머로 담은 서원 내부]

 

內三門(내삼문)에는 '六臣詞(육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사육신을 비롯하여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 엄흥도가 배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올린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담 너머로 담은 서원]

 

창절이란 모든 불의에 항거하며 대의를 따른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절개를 표창한다는 뜻에서 숙종이 사액했다한다.


창절사 앞에 있는 창절서원 원장이 이들 충신들에게 봄과 가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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