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矗石樓(촉석루)와 義妓(의기) 論介(논개)

2015. 12. 8. 06:40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8호

 

 

[卞榮魯(변영로) 論介(논개) 詩碑(시비) 전경]

 

[論介(논개) 전문]

 

矗石樓(촉석루)는 경상남도 진주시 本城洞(본성동)에 있는 누각.

고려 시대, 공민왕 때 세운 것으로 진주성 主將(주장)의 지휘소였다.

임진왜란 때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떨어져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矗石門(촉석문) 전경]


南江(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한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사용하였고,
평상시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촉석루 삼문 앞쪽에 자리한 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

 

임진왜란 당시 가장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에서

문열공 김천일, 효열공 고종후 선생과 함께 진주성을 9일간이나 지켜내다

결국 함락이 되던 날 세 사람은 진주성 촉석류에 올라 북향 사배하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한다.

후세에 이들을 촉석루 삼장사라 부른다.

 

촉석루 삼장사 詩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촉석루위 마주 앉은 세 장사들은
一杯笑指長江水(일비소지장강수)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 물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유도도)
남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않고 흘러가니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해혼불사)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矗石樓(촉석루) 삼문]

 

[촉석루 안내판 글 내용]

 

[矗石樓(촉석루) 현판]

 

[좌측에서 담은 矗石樓(촉석루)]

 

강가에 돌이 쭝긋쭝긋 솟아 있어 촉석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 병사 南以興(남이흥?~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여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불탔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락집으로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며 누각의 돌기둥은 경상남도 창원시의

촉석산에서 채석한 것이며 대들보는 오대산에서 벌채한 것이다.

 

 

[矗石樓(촉석루)]

 

진주성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촉석루이다.
촉석루는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확실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고려 말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말에 돌로 튼튼하게 진주성을 쌓을 때에 그 성의 동서남북에
누대 네채를 만들었는데 남쪽에 세운 남장대가 바로 촉석루이다.
촉석루는 그 후 여러 차례 병란으로 불타고 다시 지어지고 했는데 6.25때
불탄 것을 60년에 재건한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落花(낙화),

순국한 곳이기도 하여 유적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촉석루 앞쪽 뜰에 세워진 안내판 글 내용]

 

[촉석루 앞쪽 뜰에 세워진 안내판 글 내용]

 

 

 

[의기사 입구쪽 의기사 안내판과 의랑 논개의 비 전경]

 

[의랑 논개의 비]

 

[義妓祠(의기사) 안내판 글 내용]

 

[指水門(지수문)]

 

이 문을 들어서면 곧장 의기 논개를 모신 義妓祠(의기사)에 이른다.

 

 

[義妓祠(의기사)]

 

義妓(의기) 論介(논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며 논개의 영정을 모셔두었다.

 

 

[論介(논개) 영정]


왜장을 껴안은 손가락이 미끄러질까 봐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왜장과 함께 죽은
논개의 충절이 돋보이는 論介(논개)의 영정을 모셔놓은
의기사 터가 너무 좁아 답답해 보였다.

 

 

[의기문 쪽에서 담은 다시 담아 본 矗石樓(촉석루)]

 

이 누각의 이름은 矗石樓(촉석루)라 부르지만,

南將臺(남장대) 또는 壯元樓(장원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義巖(의암) 가는 길 팻말]

 

[의암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돌계단쪽에서 담은 남한강과 나룻배]

 

[의암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바위]

 

[義妓論介之門(의기논개지문) 비각 전경]


義巖事蹟碑(의암사적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353호)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壬辰倭亂(임진왜란)
제2차 晋州城(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어 7만 民(민), 官(관), 軍(군)
이 殉節(순절)하자 왜장을 끌어 안고 순국한 義妓論介(의기논개)의 事蹟(사적)
을 기록한 비석이다.


 

[의암 사적비 안내판 글 내용]

 

[의암 사적비 안내판 영문 글 내용]

 

[義妓論介之門(의기논개지문) 현판]

 

[義妓論介之門(의기논개지문) 碑閣(비각) 전경]

 

[義妓論介之門(의기논개지문) 碑(비)]

 

[의암 안내판 글 내용]

 

[義巖(의암)]


義巖(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다.
당시 논개의 나이는 방년 19세였으며,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 관, 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義巖(의암)에서 내려다 본 남강]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鄭大隆(정대륭, 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는 전서체로
義巖(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에는 韓夢參(한몽삼, 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해서체로 된 義巖(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義巖(의암) 바닥 넓이는 3.5m X 3.3m이다.

 

 

[南江(남강)]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은 논개의 슬픔을 남강은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떠 있는 돗단배가 한가롭다.

 

 

[남강에서 올려다 본 성벽]


의암의 주인공인 논개는 뭇사람에게 기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실이라는 말도 있다.

 

 

[의암쪽에서 담은 진주대교 전경]

 

[의암과 촉석루를 이어주는 계단]

 

남강으로 내려와 의암과 의기논개지문을

둘러본 후 다시 이 계단으로 올라 호국종각으로 향했다.

 

 

[護國鐘閣(호국종각) 현판]

 

[護國鐘閣(호국종각) 전경]

 

[김시민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


金時敏將軍(김시민장군) 戰功碑(전공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호


이 비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主將(주장) 김시민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비문에는 1천명이 되지 않은 병력으로 10만명의 군대를 물리쳤다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켰다고한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 안내판 글 내용]

 

[촉석정충단비 안내판 글 내용]


矗石旌忠檀碑(촉석정충단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호

이 碑(비)는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19일~29일 사이 있었던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三壯士(삼장사) 金千鎰(김천일),
黃進(황진), 崔慶會(최경회)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수세에 몰린 적들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왜군은 다시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 12년(1686)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 대형총통]


촉석문과 촉석루 사이에는 진주성전투에 쓰였던 대포인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현자총통이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간략한
설명문도 함께 있다.


대포가 천자나 날아간다 하여 붙여진 천자총통보다 크기가 작은 순서대로
천, 지,  현, 황을 써서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대형총통의 성능 구조 안내도]

 

[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비 전경]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쪽에서 담은 촉석루 전경]

 

[안쪽에서 담은 矗石門(촉석문) 전경]

 

촉석루 경내에는 그 밖에도 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장군동상' 승병의 양성소였던 '호국사' 김시민 장군과
임란때 함께 순절한 분의 신위를 모신 '창열사' 경상남도 감영의 정문이었던
'영남포정사문루' 진주성 서문의 지휘장대인 '서장대' 진주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진남루라는 편액을 걸고 있는 '북장대' 김시민 목사가
적탄을 맞자 곤양 군수 이광악이 목사를 대신해 나무에 의지해 돌과 화살,
진천뢰를 쏘며 '북장대전투' 를 승리로 이끌었던 '이광악나무' 느티나무
등을 볼 수 있으며, 진주 국립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함께 관람 할 수 있어서 좋다.


나라를 위한 충성은 명예를 가진 감투 쓴 관리들만이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서민들이 힘을 합쳐 의병이 일으키고 농부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부녀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힘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