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化(봉화) 忠孝堂(충효당)

2015. 12. 26. 06:18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220
문화재자료 466호

 

 

[忠孝堂(충효당) 입구 골목길]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 좌측 골목길을
접어들면 산기슭 아래 예스러운 건물이 한 채 보인다.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신도비각과 忠孝堂(충효당)이다.

 

 

 [우측 忠孝堂(충효당)]


1750년경 후손과 유림에서 조선 선조 때 사람인
李長發(이장발, 1574~1592)의 충효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좌측 관리사 주택]


후손이 거주하고 있는 관리인 주택.

 

 

[忠孝堂(충효당)]


李長發(이장발)의 자는 榮伯(영백)으로, 어려서부터
재질과 의지가 굳어 배움에 부지런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다.

 

 

[忠孝堂(충효당) 현판]

 

[담 밖에서 담은 忠孝堂(충효당)]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열아홉의 어린 나이로
편모슬하의 가장이면서도 모친의 허락을 받고 대부분의 관리가 도망친
전장으로 달려가 聞慶陣中(문경진중)에서 혈전 끝에 1592년 6월 10일 전사하였다.

 

 

[담 너머로 담은 忠孝堂(충효당)]


정자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뒤
전면에는 사주문을 설치하였으며, 담장 밖의 좌후측 언덕위에는
'忠孝堂花山李公遺墟碑閣(충효당화산이공유허비각)'을 세웠다.

 

 

[충효당 쪽문]


정문인 출입구는 닫혀 있었지만,
이곳 쪽문은 닫힌듯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두었기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忠孝堂(충효당) 현판과 내부 편액]

 

[殉節詩(순절시) 편액]

 

죽기 바로 직전에 못다한 충효의 애절한 마음을 읊은
殉節詩(순절시)를 남겨 후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百年存社稷(백년존사직)
백년 사직을 구할 계획을 가지고
六月着戎衣(유월착융의)
유월에 갑옷을 입었네

 

憂國身空死(우국신공사)
나라를 위한 근심에 몸은 비록 헛되이 죽고 말지만
思親魂獨歸(사친혼독귀)
홀로 계신 어머니 못 잊어 혼백만 외로이 돌아가네

 

 

[忠孝堂記(충효당기)]

 

[忠孝堂(충효당)]


충효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中堂挾室形(중당협실형)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忠孝堂花山李公遺墟碑閣(충효당화산이공유허비각)]


忠孝碑閣(충효비각)은

忠孝堂(충효당) 바로 뒤편에 있다.

 

 

[忠孝堂花山李公遺墟碑(충효당화산이공유허비)]


나라에서 훌륭한 순국의 공을 치하하고자
공조참의의 직위를 추증하고 출생지인 봉성면 창평리에
'忠孝堂花山李公遺墟碑(충효당화산이공유허비)'를 세우고
'忠孝碑閣(충효비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