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내 금서루 입구 비석군

2015. 11. 3. 06:34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비석군 전경]

공산성의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위치한

 錦西樓(금서루)로 오르는 오른쪽 길목에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군을 만날 수 있다.

 

 

[금서루 입구 비석군 안내판 글 내용]

 

[비석군]

공주는 근세에 충청도 감영이 있던

곳으로 충청남도 행정의 중심이었다한다.

지금은 대전이지만, 대전은 1905년 호남선이

합류하기 전까지는 회덕의 일부분에 불과한

그야말로 황무지인 '한밭' 이었습니다.

충청도 감영이 있던 공주는 관찰사와 도지사가

집무를 보는 행정도시였는데, 관찰사나 도지사가 임기를 마치고

이임할 때는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도록 압력을 넣는 경우도 많았다 합니다. 

물론 선정을 베푼 관찰사나 도지사는 주민들이 자원하여 세웠지만...
그래서 공주감영(선화당) 앞에는 항상 '功德碑(공덕비)', '頌德碑(송덕비)',
'勿忘碑(물망비)'
가 줄을 이었는데, 1932년 공부갑부 김갑순에 의해 도청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공산성 입구인 현재의 자리로 모든 비석을 옮겨놓게 됐다고 합니다.

 

[안내판 글 내용]

비의 표면은 검푸른 색을 띠고 있으며 이수와

碑身(비신)의 연결 부분은 風化(풍화)로 인하여 변색이 심한 상태이다.

김효성(1585~1665)은 광해군 5년(1613) 생원이 되었으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조, 윤인, 이위경 등이
인목대비를 해치려고 할 때 이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다
길주에 유배당하고 뒤에 진도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관직을 되찾아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청안현감이 되었고, 이후 남원, 죽산의 부사와 공주,

청주의 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오랜 외직생활동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제민천교 영세비 안내판 글 내용]

1817년 여름 홍수로 다리와 둑이 무너져 백성들이

수리를 하고자 하였으나 비용이 막대하여 이를 백성에게 거둘 수

없었기 때문에 비변사에 보고하여 충청수영의 군자미, 부여, 연기의 공전과
자체자금을 합하여 사업의 자금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碑(비)의 생긴 모양이 특이하기에 올려봅니다.

 

 

[비석군]

이 많은 비석들 중에 안내판이 붙은 것은 딱 2기 뿐.
다른 비석은 그냥 비석만 세워져 있었기에.. 일일이 읽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그냥 비석군의 모습만 담아올렸습니다.

이곳에는 세워서 더 욕된 비석도 섞여있겠지요.
명예로운 碑(비)와 함께 오래도록 세워져서 오히려 오욕을 당하는 碑(비)
그러길래 너무 큰 욕심은 화를 부르기도 하지요.

이 모든 것은 역사가 말해주겠지요.
잘못된 역사는 다시 밝혀지고 고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올려봅니다.

 

 

[비석군 전경]

공산성 성곽길을 둘러보고 내려오며 담아본 비석군 전경.

성내의 중군영의 문루였던 광복루  또 정유재란 때
주민을 按舞(안무)하였던 명의 세장군의 업적을 기린
明國三將碑(명국삼장비), 이중 명국삼장비는  일제말기
공주읍사무소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이 되자 이곳에 옮겨 놓았다 합니다.

백제 동성왕 22년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된 임류각. 공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금강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는데....

1500년전 고대왕국 백제의 숨결이 자연과 어울어져
신비로움이 가득한 이곳을 아주 천천히 둘러보지 못하고 지나친 곳이 많아서..
다음에 다시 들려보고 싶은 곳 중 하나로 마음에 새겨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