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溪(단계) 河緯地 (하위지) 묘역

2015. 10. 21. 06:47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선산읍 완전리 고방실 마을

 

 

[丹溪(단계) 쉼터]

 

河緯地(하위지, 1387~1456) 본관 晉州(진주). 자 天章(천장), 仲章(중장).

호 丹溪(단계), 延風(연풍). 시호 忠烈(충렬). 벼슬은 부제학,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세종 17년(1435) 생원을 거쳐 1438년 式年文科(식년문과)에 장원,
賜暇讀書(사가독서)를 하고, 1444년 집현전 校理(교리)가 되어
'五禮儀註(오례의주)' 詳定(상정)에 참여하였다가 1446년 同福縣監(동복현감)으로있던

형 綱地(강지)의 貪?罪(탐람죄)에 인책 사임하고, 문종1년(1451) 집현전 直殿(직전)에 등용되어

首陽大君(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앞서 新定(신정)한 '陣說(진설)'의 교정과 '歷代兵要(역대병요)'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단계 쉼터 옆 묘역가는 길]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
침착, 과묵한 淸白吏(청백리)로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
鞠問(국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車裂刑(거열형)을 당했다.

車裂刑(거열형)이란 소에 팔다리 네곳을 각각 밧줄로 묶은 다음 각기
네방향으로 서로 당겨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라 한다.

 

 

[묘역 가는 길]

 

이들은 그렇게 죽으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세조에 대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질타와 꾸중이 계속되었다 합니다.

단계 쉼터 옆 길을 따라 200m정도 가면 松林(송림)에

둘러쌓인 경사면 따라 自然石(자연석)으로 쌓은 계단을 오르면,
단계 하위지선생의 묘역이다.

 

 

[丹溪(단계) 선생 묘역 전경]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병서 편찬에 참여했던 학사들의

품계를 올리려 하자, 宗臣(종신)이 함부로 私恩(사은)을 베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반대했다가 어린 조카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수양대군에 의하여 집현전직제학으로 전보되자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갔다.

다음해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하여 춘추관편수관으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經筵侍講官(경연시강관)으로 단종에게 경사를 강론했다.

단종 3년(1455) 예조참의로 재직중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조참판으로 승진했다.

 

측근에서 세조를 보필하는 동안 세조의 녹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겨

그 해부터의 國祿(국록)은 취하지 않고 별실에 따로 쌓아두었다 한다.

 

 

[좌측 옆에서 담은 丹溪(단계) 河緯地(하위지) 묘와 문인석]

 

謝人贈蓑衣(사인증사의)   
도롱이를 보낸 준 것에 감사함 

男兒得失古猶今(남아득실고유금) 
사나이의 득실을 고금이 다룰게 없고,

頭上分明白日臨(두상분명백일임) 
머리위엔 분명이 해가 비치고 있는데

 

持贈蓑衣鷹有意(지증사의응유의) 
도롱이를 보내준 뜻 어찌 모르겠는가,

江湖烟雨好相尋(강호연우호상심) 
강호에 묻혀 조용히 살라

 

박팽년이 도롱이를 보내 주었을 때 같이 뜻 맞춰

진작에 모든 것 떨치고 낙향하였더면 한세월 강호에 묻혀

시름겨워하였을지라도 멸문지화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을…

 

 

[좌측 옆에서 담은 丹溪(단계)선생  묘와 묘비]

 

그러나 좀 더 살아서..울분과 오욕의 세월을 보내기보다는

지조를 지켜 옳곧은 마음으로 군신의 관계를 죽음으로 보여주신

그 충심이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더욱 빛을 발하는지도...

단계선생의 묘를 둘러보며, 마음 한구석 쓰리고 아팠다.

 

 

[정면에서 담은 丹溪(단계)생 묘]

 

1456년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李塏(이개),

柳誠源(유성원), 兪應孚(유응부)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복위를 추진하여

明(명)의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서 세조와 측근관료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거사가 연기되자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이 세조에게 이 사실을 알려

복위운동이 탄로나고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묘 뒤에서]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하위지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문을 받을 때 하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하로서 이제 역적이란 이름을 썼으니

그 죄가 응당 죽음일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 이 있습니까?"

 

노기가 풀린 세조는 유독 그에게만은 단근질을 하지 않았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琥(호)와 珀(박)도 連坐(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賤婢(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

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다시 담아 본 단계선생 묘역 전경]

 

참형을 당하기 전 세조는 선생의 재질을 아껴

회유와 고문을 거듭하였으나 끝내 죽음을 택하였다. 

신숙주가 뜻을 바꾸어 세조의 집권에 손을 들어 준

변절자였다면 하위지는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지조를 택한 절개의 선비였다. 

그의 호가 丹溪(단계)인 것은 출생하는 날부터 3일 동안

집앞의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묘 아랫쪽 단계 쉼터에서 담은 안산 전경]

 

태어날 때 벌써 슬픈 운명을 예견한 것일까?
위대한 한 인물의 태어남도 범인과는 다른 가 보다.

 

하위지를 비롯한 사육신들의 굳은 절개,

변하지 않는 충성 등을 후세에게 알리고 정신을 본받기 위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유허비를 세웠다 한다.


선생을 향사하던 월암서원이 도개면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월암정만 남아 있다.


비봉산 아래에 선생의 유허비(지방유형문화재 236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