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선생 사당및 묘소

2015. 10. 23. 06:36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신채호선생님을 모신 사당]


20세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며, 황성신문의 기자로 논설을 쓰며
을사조약 체결을 단호히 배격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 초빙되어 주필로서
국권회복, 민족의식 고취에 공헌하였다.

 

28세 무렵에 이동녕·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해외에 망명한 후 본격적으로 국사 연구에 힘써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등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안내판 글 내용]

 

[사당앞에 있는 간단한 선생님의 약력을 적은 비문] 

1919년 상해임시정부수립 후에는 의정원 전원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고,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旅順(여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순국하였다.


뒤늦게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순국선열 단재 신채호선생의 큰 뜻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단기 4311년(1978년) 묘소(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옆에
사당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기념관을 세웠다.


그러나 단재 선생은 조국 땅에서도 여전히 편치 못하다.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묘소를 이장하려는 유족들과 청원군이
땅보상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안채의 사당 전경]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人(인)자 모양의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정면에 '丹齋影閣(단재영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사당 앞에 '正氣門(정기문)'이라 이름 붙인 대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해방 후 시아버지의 유골이 충북 청주 낭성면 귀래리로 귀향했지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매장허가가 나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공개적으로
암장했지만 이를 도왔던 면장은 파면조치를 받았다고  이씨는 말했다고 한다.

 

신채호 선생 사당 뒤편에 안치된 묘가 봉분이 수차례 붕괴하는 등
상태가 불안정 해지자 묘를 선생의 옛 집터로 이장해 가묘를 설치했다.

 

가묘를 설치한 후 묘를 이장하려 했으나
'지방 문화재는 유가족도 함부로 손댈 수가 없다'는 규정에 막혀
군청과 갈등을 빚으면서 한 달 동안 선생의 묘가 방치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결국 군도 뾰족한 수가 없어 이장을 허가했는데 이씨는 오히려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매국노들은 땅을 속속 찾아주면서 지사들은 묘자리 하나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다.

 

 

[선생님의 사적비와 상석] 

현재 충북 청원군 낭성면에 있는 선생의 묘와 사당은

1993년 '충북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돼 청원군이 관리하고 있다.

 

관계자는 지난 7월에도 단재 선생의 묘소가 장마에

무너져 700여만원을 들여 수맥차단 작업까지 벌였다고 말했다.

 

사당뒤 작은문을 통하여 묘소로 나왔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선생님의 묘소로 보이는 봉분이 없다.

 

대리석의 반듯한 상석과 그 옆에 서 있는 사적비....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선생님은 돌아가셔서도
편히 쉴 한평의 땅도 허락받지 못하였는가?

 

 

[단재신채호선생사적비]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북받쳐오르며, 눈시울이 젖어온다.
묘소는 선생이 어린 시설에 살던 옛 집터에 안장한 것으로,
묘역에는 한용운 등이 세운 묘표석과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었다.

 

 

[사적비와 봉분이없는 묘 옆에서..]

 

암울하고 격동적인 시기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 넣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나라를 위하시다 돌아가신 많은 선열님들의 생각으로..
찹찹한 마음은 싱그런 7월의 하늘아래에서도 서러웠다.

 

 

[사당 뒤에서...]


 신채호 선생에게 호적이 없다는 사실도 놀랄 일이지만

1912년 일제의 '조선민사령'에 응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가 선생과 마찬가지로 무국적 상태라는 것은 충격적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에 출생, 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황성신문 등에 강직한 논설을 써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으며,

선생은 영웅전을 써서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북돋기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게 되고

1936년 1월 중국 여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당 뒤쪽 묘역 전경]

 

가는 빗줄기가 오락가락 하는 날 단재선생님의 기념관과 사당에

도착해서, 평일이라 사람들의 발걸음도 뚝 끊긴 고요만이 깃든 기념관과 사당을

둘러보고 떠나오며 자꾸만 눈 앞에 밟히는 선생님의 생각으로 흐려진 안경너머 여기저기
피어있는 개망초꽃이 7월의 신록속에 참으로 곱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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