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齋(단재) 申采浩(신채호) 선생 기념관

2015. 10. 17. 06:38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성면 귀래리 350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

 

 

[고드미 녹색마을 안내도와 안내글 내용]

 

[기념관 앞쪽 단재선생 하늘북 시비]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국적이 없다?
믿기지 않고 놀라운 일이지만, 실제로 신채호 선생에게는 국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이와관련해
"일제는 강점 직후인 1912년 '조선민사령'을 제정하여

조선인의 호적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단재는 그 이전인 1910년

중국 청도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국 망명했기 때문에

호적상 무국적인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중국의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국적도, 호적도 없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호적령에 따를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던 선생이
애통한 죽음을 맞이한 후 광복이 됐지만 선열들의 눈물과 피로 되찾은 이 나라는
아직까지 선생의 국적을 회복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丹齋(단재) 記念館(기념관)]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땅 찾기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해
그 질긴 기득권을 누리고 있을 때 신채호 선생의 아들인 고 신수범씨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밝힐 방법이 없어 강요된 사생아로 살면서
선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기나긴 법정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고난의 세월을 함께 했던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62)씨는 남편을 91년에 떠나보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
라며
"일생을 재판과 재판을 거듭하며 법정에서
자신의 정체를 확인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
라고 말했다 한다.

 

세월이 흘러 1986년 후손들의 노력으로 겨우 선생의 호적은

취득됐지만, 여전히 국적은 회복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아드님이 일흔 한 살에 사망하였는데 예순 여섯에 아버지를 호적에 올렸으니
"그 세월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며느님이 말씀하셨다 한다.

 

기념관내부에 전시된 자료들을 사진으로 담아 소개합니다.

 

 

 

 

 

이씨는 시아버지가 입적되면서 자식에게 할아버지의 흔적은 찾아 줄 수 있었으나
현재 선생의 땅을 상속받는 문제로 또다시 법정 소송 중이라 한다.<인터넷 참조>

국적 없는 '신채호 선생'.

대한민국은 누구의 나라이며,
이 나라는 과연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단재 신채호선생은 역사학자였지만, 언론인으로 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따라서 고대문화를 폭 넓게 이해하게 되면서
영웅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다.

 

 

 

 

 

 

1910년 일본의 조선 倂呑(병탄)후

한창호, 이갑, 이종호 선생 등과

압록강을 넘으면서 읊은 詩(시)라 합니다.

 

倂呑(병탄) : 남의 재물이나 영토, 주권 따위를 강제로 제 것으로 만듦.

 

 

 

 

[생가 전경]

 

我誤聞時君誤言(아오문시군오언)

나는 그릇 듣고 그대는 그릇 말하고

欲將正誤誤誰眞(욕장정오오수진)

그릇된 것 고치자 한들 어느 누가 진짜인지

 

人生落地元來誤(인생락지원래오)

인생이 태어난 게 본시부터 그릇된 것

善誤終當作聖人(선오종당작성인)
그릇된 것 잘 쓰면 그게 성인이 되네 그려 

단재가 지은 '詠誤(영오)'란 한시로 그의 성품을 알게 한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폭력적 항일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단재는 한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관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가 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국사의 연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