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烏書院(금오서원)

2015. 10. 2. 06:18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276
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

 

[안내판 글 내용]

 

[멀리서 바라본 금오서원]

 

이 서원은 冶隱(야은) 吉再(길재, 1353~1419년)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宣祖(선조) 3년(1570)에 지었다.

 

金烏山(금오산) 아래에 처음 지었으며 선조8년(1575) 賜額書院(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02년 현 위치로 옮겨 지었다. 

 

 

[옆으로 난 작은 문]

 

한 낮의 따가운 햇볕은 사진찍기를 거부하고...
신비속에 감추어진 천년의 침묵이 다가감을 거부하는 것도 같았다.
 

택리지(擇理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善山(선산)에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산의 인재를 꼽자면 고려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인

고려 遺臣(유신) 冶隱(야은) 吉再(길재, 1353~1419)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숱한 인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다.

 

 

[사당 밖에서 본 금오서원]

 

오히려 선산 인재들이 바로 그에게서 나왔으며,

조선 선비 즉 士林(사림)들도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선산은 길재의 조선 주자학의 산실인 셈이다.

 

 

[사당 안에서 바라본 정문]

 

금오산 동쪽 산자락이 길재가 태어나고 살다가 묻힌 땅이며,
영남 유학의 산실이자 조선 주자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길재 死後 150여 년이 지나 금오산 아래 세워졌으며,

이름 또한 금오서원으로 명명되었다.


 

[사당정문 오른쪽]

 

원래의 서원자리는 임진왜란당시 불타 버려서,
몇 년 뒤 북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워졌다.

 

학문을 강론하던 강당인 정학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며,
사당인 상현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그리고 읍청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서원 안 왼쪽에서 바라본 서원정문]

 

지금 금오서원이 위치한 주소는 경북 구미시 선산읍 원1동이지만,
여전히 금오서원은 금오산을 떠나있지 않고 금오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정몽주. 이색과 함께 고려 후기에 절의를 지킨 '高麗三隱(고려삼은)'으로

불리는 학자이며,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한 것을 알고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金烏書院(금오서원)]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5년(1602)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고, 광해군 1년(1609)에 다시 사액되었다.

이 때 점필재 김종직. 신당 정붕. 송당 박영. 여헌 장현광을 추가로 모셨다.

 

서원 경내에는 위패를 모시고 있는 상현묘를 비롯하여 정학당, 동재와 서재, 읍청루 등이 있다.

 

 

[우측에서 담은 서원모습]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철거되지 않은 서원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가꾸지 않아서 인지...
무성한 풀들만 제 세상을 만난듯 마당가득 자라고 있었다.

 

 

[좌측에서 담은 서원모습]

 

창왕 1년(1389)에 門下注書(문하주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고 노모의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다.

 

 

[읍청루]

 

현재 그 자리에는 採薇亭(채미정 : 경북기념물 55)이 있다.

옛날 중국 주나라 백이와 숙제가 충절을 지키며 수양산에 숨어 살았다는 고사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金烏書院(금오서원)]

 

조선이 건국되고 세자 이방원(태종)이 관직에

임명하였으나, 거절하고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정학당]

 

야은 길재는 금오산(金烏山) 아래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학생을 가르치다 생을 마친 그야말로 금오산인이다.

 

 

[서당 안에서 본 정문]

 

현재까지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씩 많은 사람이 모여

오현 선생의 높은 덕을 기리며 享祀(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당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안산 전경]

 

영남의 중심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낙동강은 이제 더 이상의 예전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그 옛날의 기억들을 간직한 채 말없이 오늘도 내일도 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