儉齋(검재) 金楺(김유) 신도비와 묘역

2016. 12. 2. 06:11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 8 번지

 

[정면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묘역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神道碑(신도비)

 

[뒤쪽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옆쪽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신도비쪽에서 담은 儉齋(검재) 金楺(김유) 묘역 전경]

金楺(김유, 1653~1719) 본관 淸風(청풍)
자 士直(사직), 호 儉齋(검재), 관찰사 澄(징)의 아들.
朴世采(박세채). 宋時烈(송시열)의 문인.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박세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儉齋(검재) 金楺(김유) 묘 전경]

일찌기 학문에 조예가 깊어 朴世采(박세체)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며, 宋時烈(송시열)도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겼다 한다.

 

[儉齋(검재) 金楺(김유) 묘]

현종 15년(1674) 慈懿大妃(자의대비)의 服喪問題(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제2차 禮訟(예송)이 벌어져, 朴世采(박세채). 宋時烈(송시열) 등이
화를 당하자 경기도 利川(이천)에 은거했다.

 

묘비와 묘 전경]

숙종 9년(1683)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종 11년(1685)
창릉참봉에 제수되었고, 숙종 13년(1687)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 후 庚申換局(경신환국)에 관련되어 삭직되고
禁錮(금고)되었다가 숙종 20년(1694)에 복직되었다.

이후 호조좌랑, 호조정랑, 과천현감, 부평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墓碑(묘비)]

[좌측에서 담은 묘역 전경]

숙종 34년(1708) 최석정과의 다툼으로 인해 벼슬을 내놓고 한거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결국 부교리 겸 남학교수가 되었다. 

후에 벼슬이 병조참판,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영조 17년(1741) 文敬(문경)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 앞 우측 석물]

[묘 앞 좌측 석물]

[묘 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左贊成(좌찬성)에 追贈(추증),
瑞興(서흥)의 花谷書院(화곡서원)에 祭享(제향)되셨다.

 

[인터넷에서 모셔온 김유선생 영정(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481호로 지정)]

이 초상은 당당한 풍모에 서린듯한 백발이 위품을
더해주는 것으로서 우측 상단에 '검재 김유선생화상'이라
묵서되어 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64세 시사라 기록되어 있다.

 

[묘에서 담은 신도비 전경]

纂修郞官(찬수낭관)으로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增補(증보)했다.

문헌으로 儉齋遺稿(검재유고) 小學集註(소학집주)
增補朱子外記(증보주자외기) 尊周錄(존주록)등이 있으며,
김천 봉산면 봉계출신의 매계 曺偉(조위)선생의
문집인 '梅溪集(매게집)'의 발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