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賓卿(예빈경) 韓光胤(한광윤) 墓(묘)

2016. 11. 23. 06:02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신장리 744 

 

[마을 입구의 청주한씨 세장산 표지석]

[追遠齊(추원재) 전경]

[담너머로 담은 追遠齊(추원재) 전경]

[예빈경 한광윤 묘역 전경]

이 묘소는 失傳(실전)되어 오랫동안 韓(한) 政丞(정승) 墓(묘)라
구전되어 오다가 이 묘역에서 '예빈경 한광윤지묘'라는 비석이 발견된 뒤
문중의 헌성으로 제실을 마련하고 묘역을 정비하여 신도비를 세웠다.

 

[新(신) 舊(구) 두 基(기) 神道碑(신도비) 전경]

[舊(구) 神道碑(신도비)와 묘역 전경]

조선 世祖(세조)때 영의정을 지낸 풍운아 韓明澮(한명회)의
6대조 할아버지인 고려시대 禮賓卿(예빈경) 韓光胤(한광윤)의 墓(묘)다. 

이 墓(묘)는 신라시대 道詵(도선)이
所占(소점)한 우리나라 8대 明堂(명당)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韓光胤(한광윤) 墓(묘) 전경]

淸州韓氏(청주한씨) 韓光胤(한광윤)은 고려 때의 文臣(문신)으로
公(공)의 諱(휘)는 光胤(광윤)이며, 청주한씨 시조 한란의 아들이다.

 

[韓光胤(한광윤) 墓(묘)]

전래되는 이야기로는 이 묘에 안장되어 있는
韓光胤(한광윤)의 아들 韓康(한강)이 아버지를 이곳에 예장하고
이 문중에서 여섯 왕비와 열 두 정승 그리고 스물 네 명의 공신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정면에서 담은 韓光胤(한광윤) 墓(묘)]

[묘앞 묘비]

[구 묘비]

[묘와 묘비]

신전된 공의 묘소를 다시 찾았으나 비석에 새긴 글자가
닳아 없어지고 또 깨어진 데가 있어 原碑(원비)는 그대로 두고
新碑(신비)를 세우기로 하고 英祖 21年(1745) 후손인 元震(원진)이 지은
碑文(비문)을 1746년 7월에 靈光郡守(영광부사)로 부임한 啓震(계진)이
墓所(묘소) 左側(좌측)에 세웠다.

 

[우측 묘앞 석물]

[좌측 묘앞 석물]

[묘뒤에서 담은 앞 전경]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묘앞에서 담은 재실과 신도비 전경]

[뒤쪽에서 담은 新(신) 舊(구) 두 基(기) 神道碑(신도비) 전경]

[수호샘 안내문 비와 수호샘 가는 길]

[추원재 수호샘 안내문 글 내용]

[수호샘 전경]
 
追遠齊(추원제) 건너 옆으로 수호샘이 있는데
이 墓域(묘역)에 몰래 墓(묘)를 쓰면 한 순간에 옹달샘의
물 色(색)이 황토색으로 급변한다고 한다.(자세한 것은 위 안내판 글을 참고하셔요.)

 

[수호샘]
 
매년 음력 3월 초하루에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내는데
평소에 극성을 부리던 쥐들이 이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고 한다.

 

[追遠齊(추원재 옆 전경]

 

추원재 솟을대문이 잠기어 있어서 담너머로 담고 묘역으로 향했는데...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며, 자세히 살펴보니 추원재 솟을 삼문 좌측으로 돌아가면,

추원재로 들어가는 협분이 있는데, 다행히 열려 있어서 들어가 담아 왔습니다.

 

[追遠齊(추원재) 현판]

[追遠齊(추원재) 전경]

정면 4칸, 측면 2.5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재실이다.

 

[줌으로 당겨 담은 한광윤 묘 전경]

영광의 명당으로 소문난 법성면 신장리에 있는
용사취회혈이라고하는 한광윤 선생의 묘소의 발복으로
청주한씨 후손들은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고 믿고있으며
忠成公(충성공) 韓明澮(한명회)의 6대 祖(조)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