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사 입구 청풍김씨 묘역

2016. 11. 22. 06:20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왕림 웃마을

 

[백운사 입구 표석]

[孝貞(효정) 金東獻(김동헌) 神道碑(신도비) 전경]

왕곡동 왕림마을에서 백운사로 이르는 소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입산통제소를 막 지나 그의 신도비가 나온다.

 

[孝貞(효정) 金東獻(김동헌) 神道碑(신도비)]

비문은 尹定鉉(윤정현)이 짓고, 金世均(김세균)이
썼으며, 洪淳穆(홍순목)이 전액을 올렸다.

 

 

神道碑(신도비)를 지나
효정 김동헌의 묘와 청풍김씨 묘역으로 향했다.

 

[묘역 가는 길]

[묘역 가는 길 2]

[묘역 가는 길 3]

[孝貞(효정) 金東獻(김동헌) 墓(묘)]

金東獻(김동헌, 1791~1869) 본관은 淸風(청풍)
자는 子敬(자경) 호는 孝貞(효정) 대사간 致侯(치후)의 증손이다. 

조부는 이조판서 鍾正(종정) 아버지는 도정 命淵(명연)
淸寧君(청녕군) 東健(동건)의 동생이다.

순조 30년(1830) 토목과 건축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繕工監(선공감)의 監役(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마침 부친상을
당하였으므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832년 세자익위사부솔이 되었으며 이어서 오위사과,
사복시주부, 충훈부도사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임실현감,
영천군수, 광주부판관, 담양부사, 안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850년 철종이 즉위하자 품계는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공조참의, 호조참의, 승정원우부승지, 오위장,
첨지중추부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철종 11년(1860) 漢城府右尹(한성부우윤)이 된 이후
도총부부총관, 공조참판, 同知義禁府事(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고 經筵特進官(경연특진관)에 차임되었다. 

1862년 江華府留守(강화부유수)가 되었고,
고종3년(1866) 병조참판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와
지돈녕부 의금부판사에 까지 승진하였다. 

사후 그는 좌찬성과 우의정에 추증되고
孝貞(효정)의 시호가 내려졌다.

 

[墓碑(묘비)]

判書贈左贊成孝貞金公東獻墓(판서증좌찬성효정김공동헌묘)
贈貞敬夫人韓山李氏祔右(증정경부인한산이씨부좌)

아들 학성이 찬하고, 손자 규홍이 썼으며,
전면은 이조판서 李時敏(이시민)이 썼다.

사후인 1868년에 左贊成(좌찬성)과 右議政(우의정)에 추증되었다.

 

[文簡公(문간공) 金東健(김동건) 墓(묘)]

金東健(김동건, 1788 ~1848)은 命淵(명연)의
장자로 文化縣令(문화현령) 世淵(세연)의 양자가 되었다.
자는 子順(자순)이다. 

원래 묘소는 의왕읍 고천리 고정동에 있었는데
도시화로 인해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한다.

청송심씨와 전주유씨의 묘는 卜竹洞(복죽동)에
처음 아래위로 장사지냈다가 김동건 사망 후인 1849년
이곳 으로 합장한 것이다. 

19세기 사대부가의 葬法(장법)에 좋은 자료가 된다.

 

[墓碑(묘비)]

묘표는 방부개석형으로 전면에
吏曹判書文簡公東健之墓(이조판서문간공동건지묘)
贈貞夫人靑松沈氏祔左(증정부인청송심씨부좌)
贈貞夫人全州柳氏祔右(증정부인전주유씨부좌)라 기록하였다. 

음기는 조카 金學性(김학성)이 찬하고 손자 김규승이 썼다. 

 

[都正(도정) 金命淵(김명연) 묘(墓)]

金命淵(김명연, 1753~1830) 순조 30년
김종정의 셋째 아들로 자는 原明(원명)이다.

 

[우측에서 담은 묘비와 묘]

都正 贈 李曺判 書 金公命淵 墓(도정증이조판서김공명연묘)
贈貞 夫人 南 陽 洪氏 祔 左 (증정부인남양홍씨부좌)
아들 동헌이 짓고 손자 학성이 섰다.

 

[도정 김명연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이조판서 金洙(김수) 묘 전경]

[이조판서 金洙(김수) 묘]

묘비에는
贈李曺判書 金公洙 配(증이조판서 김공수 배)
贈貞夫人宛山李 墓(증정부인완산이씨 묘) 라 적혀 있다.

 

[김수 묘에서 담은 金忠伯(김충백) 墓(묘) 전경]

[金忠伯(김충백) 墓(묘)]

金忠伯(김충백, 1540~1613) 金友曾(김우증)의
현손이며, 金繼(김계)의 아들로, 자는 君怒(군서)이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잠시 어머니를 잃어버려
죽음을 무릅쓰고 백방으로 찾아 헤맸다. 

어머니는 적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적은 그의
효심의 지극함을 알고 위로한 후 어머니를 돌려 보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충백은 여묘를 지어 3년을
살면서 친히 불을 지피고 아침, 저녁으로 슬피 추모하였다.

 

[김충백 墓碑(묘비)]

묘비는 방부원수형으로 비제는
贈參議金公忠伯之墓(증참의김공충백지묘)라 하였다.

 

[驪興閔氏(여흥민씨) 墓碑(묘비)]

부인 여흥민씨의 묘표는
贈戶曹參議金公忠伯配(증호조참의김공충백배)
贈淑夫人驪興閔氏之墓(증숙부인여흥민씨지묘)이다.

청주 탑연리에 장사지냈다가 후에 합장할 때
옮겨온 것으로 김재로가 음기를 짓고, 김치만이 썼다.

 

[김충백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내려오며 다시 담은 청풍김씨 묘역 전경]

맨 앞쪽 孝貞(효정) 金東獻(김동헌) 墓(묘)
중간 文簡公(문간공) 金東健(김동건) 墓(묘)
맨 뒤쪽 都正(도정) 金命淵(김명연) 묘(墓)

 

[백운사 표석 뒤면]

제가 좋아하는 글이 있기에 담아 올려봅니다.
청풍김씨 묘역 답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