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淵(박연) 墓所(묘소)

2016. 8. 26. 06:10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산 49-1

 

[景蘭齋(경난재) 전경]

박연선생의 재실(재각)
이곳에서 우측 산길을 700m쯤 오르면 묘소가 있다.

 

[경난재 안내글 내용]

[묘역 아래쪽 비석군]

[大提學文簡公朴先生神壇碑(대제학문간공박선생신단비)]

[묘소 안내판 글 내용]

[박연 선생 묘 전경]

朴堧(박연, 1378~1458)
초명 然(연). 자 坦夫(탄부), 호 蘭溪(난계).
아버지 天錫(천석)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통례문부사 金珸(김오)의 딸이었다.

부인은 礪山宋氏(여산 송씨)로 판서를 지낸 宋贇(송빈)의 딸로 
자녀는 3남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孟愚(맹우)는 현령을 지냈고,
둘째아들 仲愚(중우)는 군수를 지냈으며, 막내아들 季愚(계우)는
박팽년 등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삼남 계우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할뻔 하였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화를 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81세로 고향의 高塘里(고당리)에서 돌아가셨다.


[박연 선생 묘]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敎理(교리),
持平(지평), 文學(문학)을 거쳐 세종 때에는
樂學(악학)의 別坐(별좌)로 궁중의 음악을 관장하였다.

이때 石磬(석경), 編磬(편경) 등의 아악기를 만들었으며
鄕樂(향악). 雅樂(아악). 唐樂(당악)의 악보와 악기, 악곡을
정리하고 樂書(악서)를 편찬하는 등 국악 발전에 힘썼다.

 

[좌측 옆에서 담은 묘]

효자 박연의 전해오는 이야기

박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심천면 마곡리에 묘를 쓰고
시묘(묘옆에 움막을 짓고 묘를 짓고 모시는 일) 살이를 하던 때의 일이다.

소년 박연이 매일 밤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꼬박 밤을
새우다시피 하자 시묘 첫 날밤부터 어디서 나타났는지 호랑이
한 마리가 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린 박연과 묘를 지켜 주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도 또 그 다음 다음 날에도
호랑이는 걸르지 않고 소년 효자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호랑이는 밤이 늦도록 묘 앞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박연 소년은 은근히 호랑이의 안부가 궁금 하였다.
소년 박연은 새벽녘까지 잠을 한 잠도 이루지 못했다.
잠을 설친 소년 박연은 거의 먼 동이 틀 무렵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꿈속에 호랑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상주님...상주님 제발 저를 살려 주옵소서 저는
당제(지금의 길현리)에서 함정에 빠져 바로 죽게 되었습니다. 상주님..."
소년 박연은 꿈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랑이의 애원이 꿈만 같지가 않았다.
'호랑이가 함정에빠져 눈물로 호소해 왔는데 내가 이러고 있다니...'
소년 박연은 어머니의 묘소를 떠나 당제 쪽으로 달렸다.

내를 건너고 언덕을 넘어 당제까지
달려갔을 때 거기에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꺼내 놓고 삥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 박연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호랑이를 보았다.

틀림없이 어머니 묘소를 지켜주던 호랑이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이미 숨이 진 뒤여서 박연이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소년 박연은 눈물을 흘리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호랑이를 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은 박연의 효심과 짐승과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 호랑이를 넘겨 주었다.

죽은 호랑이를 어머니 묘소 밑으로 매고와 정성을 다해 묻어 주었다.
박연은 해마다 이 호랑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어 생시의 고마움을 추모하였는데
박씨 문중에서는 박연 어머니의 묘소에 제사를 지낼 때마다 반드시 호랑이 무덤에도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전해 온다.

 

[묘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특히 국악의 기반을 마련한 공이 인정되어
고구려 王山岳(왕산악), 신라의 于勒(우륵)과 함께
三大樂聖(3대악성)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의 고향인 영동군에서는
해마다 난계예술제를 열어 그의 업적을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