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2. 06:05ㆍ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사적지 입구쪽 신도비 전경]
좌측 대사헌 경질공 金之慶(김지경) 神道碑(신도비)
우측 그의 아들 좌의정 문대공 金應箕(김응기)
父子(부자)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일각문과 충렬당 전경]]
충렬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이 닫혀 있어서
어디로 들어가야하나 살펴보니, 지나쳐온 훤히 열린 대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
[충렬당 일각문 앞쪽 내판 글 내용]
[입구쪽에서 담은 농암 김선생 사적지]
충정공 농암 金澍(김주) 생몰년 미상.
본관 善山(선산) 자 澤夫(택부), 호 籠巖(농암).
金濟(김제)의 아우로 高麗(고려) 忠臣(충신) 禮儀判書(예의판서)에 이르렀다.
1798년 정조는 忠貞(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증손과 현손들은 높은 벼슬에 오른 자들이 많았는데,
대사헌 金之慶(김지경)이 바로 선생의 증손이며,
김지경의 아들 金應箕(김응기)는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대문쪽에서 담은 김주선생 사적지 전경]
고려 말에 중국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러
조선이 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입국하지 않고, 집안에는 자신을 죽은 것으로 치라는 유언과,
"장례를 지낸 후엔 誌文(지문)과 墓碣(묘갈)을 쓰지 마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중국의 吳楚(오초) 지방으로 떠났는데,
후에 김주의 사위라는 사람이 집안사람을 찾아 이 사실이 알려졌다 한다.
[사적지에서 충렬당으로 들어가는 협문]
명나라 황제는 그의 소식을 듣고 그에게
예부상서의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자 상서의 녹을 내렸다.
그 자손들이 대대로 전하여 12월 22일을 기일로 삼았는데,
이날은 바로 선생이 압록강에서 편지를 보낸 날이다.
선생의 무덤에 아직까지 表石(표석)이
비어 있는 것은 선생의 遺命(유명)을 따랐기 때문이라한다.
[來格廟(내격묘) 현판]
[농암 김주 선생 사당 來格廟(내격묘)]
제청인 忠烈堂(충렬당)과
사당인 來格廟(내격묘)가 전후로 배치되어 있다.
來格廟(내격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이다
[忠烈堂(충렬당) 현판]
尤菴(우암) 宋時烈(송시열) 선생의 글씨라 한다.
[忠烈堂(충렬당)과 신도비 전경]
충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충렬당 내부(애니메이션으로 편집)]
[농암 김주선생 신도비 앞면]
[농암 김주선생 신도비 뒷면]
수암 권상하선생이 짓고,
관복재 金構(김구) 선생이 썼으며,
단암 민진원선생이 전액하였다.
[농암 김주선생 舊(구)신도비]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깨어진
구신도비가 신도비 앞쪽에 놓여 있었다.
[충렬당쪽에서 담은 일각문 전경]
[충렬당쪽에서 담은 사당 來格廟(내격묘)]
압록강에서 書狀官(서장관)과 헤어지면서 준 시 / 籠巖(농암) 金澍(김주)
瀧樹蒼蒼塞日昏(롱수창창새일혼)
언덕위의 푸른나무 해를 막아 어둡고
白山雲雪照離樽(백산운설조이준)
백두산의 구름과 눈 이별의 술잔에 비취네
君行莫恨天涯別(군행막한천애별)
그대는 가서 천애의 이별을 한탄마오
我是歸人亦斷魂(아시귀인역단혼)
나는 이에 살아서 돌아가나 혼은 죽었네.
[내격묘와 충렬당 사이의 협문]
고려 말의 충신 籠岩(농암) 金澍(김주)가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농암의 유허비각이 있다.
재궁은 金澍(김주)를 추모하는 충렬당 내격묘 신도비와
문대공 金應箕(김응기) 신도비가 있다 하여 재궁이라 한다.
[협문쪽에서 담은 충렬당 뒤 전경]
농암의 형님이신 白巖(백암) 金濟(김제) 그 역시
고려말 충신으로 평해군수를 지내시다가 개국소식을 듣고
크게 통곡하며 임금이 계신 방향으로 두번 절하고
"忠臣不事二君(충신불사이군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과 시 한편을 남기고,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동해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呼船東問魯連津(호선동문노연진)
배를 불러 동쪽 魯仲連(노중연)의 나룻터를 묻노라
五百年今一介臣(오백년금일개신)
오백년 왕조의 초개같은 이 신하
可使孤魂能不死(가사고혼능소사)
외로운 이 영혼 이 길이 남는다면
願隨紅日照中垠(원수홍일조중은)
붉은해 따라가 중원땅을 비추리
김제 선생의 위패는 현재 구산리에 있는 운암서원에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선생이 떠난 도해암에도
꼭 한번 들려보고 싶은 곳으로 마음에 새겨두었다.
[협문쪽에서 담은 보수중인 가옥]
[충렬당에서 담은 묘소 전경]
멀리보이는 우거진 숲 사이로 보이는 묘소
[줌으로 당겨 담아 본 묘소 전경]
묘소 소개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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