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

2016. 5. 11. 06:20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시아버님 기제사 참석차 강릉 큰조카댁에 들렸다가
초당두부를 먹으려가자기에 함께 하였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2009년도에 다녀온 허균. 허난설헌 생가와 기념공원을 지나치게 되어
들려보실래요. 하길래 마다하지 않고 그러자 하였지요.^^

 

[안내판 글 내용]

[안내도]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현판]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이른 시간이라 개관을 하지 않았기에...
기념공원으로 향했다.

 

[난설헌 허초희 동상 전경]


許曄(허엽, 1517~1580) 본관은 陽川(양천). 호 草堂(초당)이다.
오늘날의 지명이 초당인 이유도 허엽선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였던 허난설헌이 바로 허협의 딸이다.
본명은 楚姬(초희). 자는 景樊(경번), 호는 蘭雪軒(난설헌)이다.

 

[난설헌 허초희 동상]


초당 허엽은 조선 선조 때 동인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로
슬하에 첫째 부인 청주 한씨 몸에서 두 딸과 허성을 두었고
첫째 부인 사별 후 정실로 들어온 강릉 김씨의 몸에서 세 자녀를
두었으니 허봉,허난설헌, 허균이 있었다.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으며,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文翰家(문한가)로 유명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났다.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집안과 교분이 있던 李達(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8세에 ‘廣寒殿白玉樓上梁文(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고까지 했다.

 

[시비공원쪽에서 담은 기념관 전경]


15세에 金誠立(김성립)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기방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고,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하였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했다.
친정집에는 獄事(옥사)가 있었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시비공원 五文章碑(오문장비) 전경]


사진 속 우측 시비부터 소개합니다.


고성의 해산정에서 / 초당 허 엽
밤에 남루에 올라 / 악록 허 성
난하에서 / 하곡 허 봉
죽지사 3 / 난설헌 허 초희
경포호 정자 / 교산 허 균

 

 

난설헌 허초희 문화제를 하고 있었다.

 

 

난설헌은 평소에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 처럼 말 했다고한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생가 앞 우물]

[난설헌 허초희 문화제 포스트]

[생가 앞]

[솟을삼문]


詩(시) 213수가 전하며, 그중 신선시가 128수이다.
그녀의 시는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신선시와
삶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으로 대별된다.


후에 허균이 명나라 시인 朱之蕃(주지번)에게
시를 보여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고집으로 '난설헌집'이 있다.

 

 

이른 시간이라 분비진 않았지만...
준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잦았다.

 

[사랑채]


난설헌의 짧고도 불행했던 일생에서 그나마
동생 허균과 더불어 이달한테서 시를 배우던 그때가
아마도 가장 행복했던 한 때였을 것이다.

 

[교산 허균 영정]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알려진 교산 허균

 

[허난설헌 허초희 생가 입구]


옛날에 선비들이 모여서 글공부하던 곳을 接(접)이라고 했다.
김성립이 접에 가서 공부는 하지 않고 계집질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난설헌은 짤막한 오언시를 지어 보냈다.


古之接有才 / 옛 접에는 재 있더니
今之接無才 / 요즘 접에는 재 없더라.


이는 옛날의 접에는 재방변(才)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재방변이 없어져 첩(妾)만 남았구나.


그러니까 공부한다는 것은 핑계요 계집질만 하고 있구나
라는 신랄한 풍자였던 것이다.

 

[허난설헌 허초희 생가]


가옥의 구조는 안채, 사랑채, 부속채인 대문간채가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집터라 전하고 있다.


대문간채와 직접 연결된 넓은 마당 공간을 확보한 사랑채는
안채의 건너편에 'ㄱ'자형으로 배치하여 안채와 서로 연결시켰으며,
사랑채 옆에는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내와 담을 쌓아서 줄입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물간과 방앗간 옆으로 협문을 두어
여자들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여 남녀의 구분을 엄격히 하였다.

 

[허난설헌 허초희 영정]

[봄날 생가에 만발한 꽃 애니메이션]

[인증샷]


고운 꽃과 장독대  장독위 정한수 한그릇 앞에서....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전경]


시비공원과 생가를 방문하고 나오는 길에
행여나 하고 다시 들려보았더니, 기념관 문도 열려 있고,
문화탐방을 온 초등생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해설사의 문화해설을 듣고 있었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기념관으로 들어갔지요.

 

[기념관 내부의 허초희 안내글]

[애니메이션으로 담아 본 전시관 내부]


시대를 앞서 세상과 화합하지 못했던 두 예술가
허난설헌과 허균 16세기 말 조선시대는 남존여비가 엄연히
존재하던 사회로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여성은 삼존지도라 하여 남성들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대를 살아야했던 허난설헌 여성의 예속과 자신의 처지를 깊이 인식하고
한탄과 분노를 詩(시)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기에 단명한 천재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초희 전통차 체험관 현판]

[초희 전통차 체험관]


어린시절부터 장차 훌륭한 대문장가로서의
소질을 발휘했던 허난설헌과 허균, 이들 남매는
오빠이자 형이었던 허봉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당시 여성으로서 학문을 하지 못했던 허난설헌은
오빠 허봉의 도움으로 배울 수 있었고 허균은 둘째 형 허봉에게
古文(고문)을 익혔으며 뒤에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글을 배웠다.


무엇 보다도 허난설헌과 허균 남매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스승은 서얼 출신으로 삼당파 서인의 한사람인 이달이었다.


이들 남매는 신분제도의 모순과 유교사회의 행동규범을
비판했던 손곡 이달의 사상을 고스란히 채득하고 있었다.

 

[체험관 출입구 전경]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신분제도와 봉건적
사회제도로 서얼 출신은 호부호형 금지, 과거응시
자격박탈 등 嫡庶差別(적서차별) 제도가 있었다.


허균은 적자 출신이었지만,
당시 조선시대 체제의 모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천민 등이 지닌 재능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으며
그 만큼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의 수 많은 詩(시) 작품과 홍길동전 같은 한글소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허난설헌'
그는 그 시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후
중국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나,
조선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한 불우한 천재시인이셨다.

 

 

 

 

'문화산책 > 고택과 문학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동 민속박물관(1층 전시관)  (0) 2016.06.01
默溪宗宅(묵계종택)  (0) 2016.05.24
초허 김동명 문학관  (0) 2016.05.02
김승옥 문학관  (0) 2016.04.09
정채봉 문학관  (0) 2016.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