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4. 06:36ㆍ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35-1
경북민속자료 제19호
[종택 삼문과 앞쪽 안내판 전경]
'默溪(묵계)'라는 지명은 원래 '居墨驛(거묵역)'이었다 한다.
1500년에 김계행이 머물면서 '默村(묵촌)'으로 바뀌었는데,
김계행이 晩休亭(만휴정) 냇물이 잔잔히 흐르는 모습을 보고
다시 '默溪(묵계)'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종택 솟을삼문]
열린 대문에는 國泰(국태) 民安(민안) 이란 글이 붙여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꼭 필요한 말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평안해 진다면 더 바랄게 없겠지요.
[솟을삼문 옆 벽에 붙어 있는 안동김씨-묵계종택]
[寶白堂(보백당) 전경]
종택 솟을 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寶白堂(보백당)이다.
[寶白堂(보백당) 현판]
현판을 글 寶白堂(보백당)은 선생의 호이기도 하지만...
'吾家無寶物(오가무보물) 寶物惟淸白(보물유청백)'
(우리 집에는 보물이란 없나니 오직 있다면 청백 뿐이다.)
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淸白(청백)'을 보배로 여긴다는 뜻이라한다.
선생은 자연을 벗삼아 묵계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87세에 돌아가셨다.
[寶白堂(보백당)]
안동 김씨 묵계 종택의 사랑채이다.
안채와 함께 최근에 수리하여 집이 매우 깨끗하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집으로, 왼쪽에 대청이 있고 오른쪽에 방을 들였다.
[寶白堂(보백당) 대청]
대청의 옆면과 뒷면에는 판벽을 세우고 문얼굴을 내어 창을 달았는데,
보통의 경우 여닫이인데 반해 이 집은 미닫이로 구성하였다.
비록 수리되기는 하였지만, 단아하고 착실한 맛을 잃지 않은 집이다.
보백당은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청]
마루에는 보백당이란 현판과 보백당중건상량문이 게판되어 있는데
보백당 편액은 조선 말기에 한학과 서예로 이름난 東農(동농) 金嘉鎭(김가진)
선생의 글씨이고 상량문은 번암 柳淵楫(류연즙) 선생이 지었다.
[보백당 앞 노거수(향나무)]
[보백당 뒷 전경]
[사당]
보백당과 용계당 사이에는 사당이 모셔져 있으며,
대문에는 尊祖(존조) 重宗(중종)이라 쓴 글이 붙여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된 홑처마 맞배지붕의 소박한 건물이다.
[사당쪽에서 담은 정침(용계당) 전경]
金係行(김계행, 1431-1517)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 取斯(취사), 호 寶白堂(보백당), 시호 定獻(정헌) 본관 (신)안동이다.
[龍溪堂(용계당)]
선생은 연산군 때 정치가 날로 문란해져 폐단이 심해지자
이의 시정을 왕에게 극간하였으나 고쳐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풍산 소산마을로 돌아왔다.
[龍溪堂(용계당) 현판]
[정면에서 담은 정침인 龍溪堂(용계당) 전경]
묵계종택은 정침과 별당인 보백당 및 가묘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ㅁ'자형의 전형적인 안동지방 주택건축물로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사랑 마루에 동농 선생이 쓴 龍溪堂(용계당)과
默隱齋(묵은재)란 편액이 걸려있어 사랑채의 품위를 더해 주는 것 같다.
[정침옆 안채로 통하는 대문]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어 다 볼 수 없기도 하지만...
문이 닫혀 있어서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안쪽에서 담은 종택의 솟을 삼문 전경]
民安(민안) 이란 글씨가 자꾸만 눈에 띄네요.
답사를 마치고 만휴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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