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水三山(이수삼산)의 永川(영천) 朝陽閣(조양각)

2016. 3. 21. 06:29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 1-1

 

[朝陽閣(조양각)]

이 누각은 공민왕17년(1368) 부사 이용이 처음 짓고

明遠樓(명원루)라 불렀으나  뒤에 조양각, 혹은 瑞世樓(서세루)라 고쳐불렸다. 


여기에는 영천의 지형을 봉황새의
형국으로

파악한 風水地理說(풍수지리설)이 깔려있다 한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앉는 새이므로 오동이 자라는

'朝陽(조양)'이 필요하고, 봉황새가 조양의 오동나무에만 앉아 있는

세상은 상서로운 세상이므로 바로 瑞世樓(서세루)가 되는 것이다.

 

이 누에는 그 옛날 명원루의 낙성 잔치에서

圃隱(포은)은이 지었다는 시를 비롯하여 栗谷(율곡),

四佳(사가), 蘆溪(노계) 등 明賢(명현)들의 시문 수십 편이 걸려있다.

 

조양각은 정면5칸, 측면3칸으로 되어 있으며 이 고장을 거쳐간

수많은 명현, 풍류객들의 싯구가 조각된 80여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영남 三樓(3루)로 손꼽혔다고 한다.

 

[정면에서 담은 瑞世樓(서세루)]

 

영천시에서 이웃도시로 가는 고갯길은
아직도 옛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안강, 포항, 영일지역으로 나 있는 시티재,
대구로 가는 땀고개, 군위, 의성방면으로 가는 갑티재,
경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채약산과 구룡재가 있고,
청송으로 가는 길에는 노구재가 있다.

 

'잘가는 말도 영천장, 못가는 말도 영천장'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아무리 빨리 가도 영천장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뜻이거나,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가보아도
영천장에서 만날것이라는 좋은 말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넋두리였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경상도 남단의 모든 상거래는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며, 四通八達(사통팔달)의 교통요지라는 뜻일 것이다.

 

忠義(충의)와 禮(예)가흐르는 二水(2수)와 三山(3산)의
고장을 일찌기 四佳(사가) 徐居正(서거정)은 永川(영천)을 일러 
二水三山次第開(이수삼산차제개 : 두 강물 세 산이 차례로 펼쳐졌다)라 노래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게 빼앗겼던 城(성)을 전국 최초로
주민들의 힘으로 되찾는 등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섰던
傳統(전통)과 祖上(조상)의 얼이 담긴 故場(고장)이기도 하다.

 

山水(산수)가 비록 아름답다 할지라도
사람이 있어야 더욱 아름다우며 사람이 남긴
文化(문화)가 있어서 더욱 더 아름다운것 같다.

 

[황성옛터 노래 비]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ㅡ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을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황성옛터 라는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노래를 작사한 王平(왕평 :  본명 이 응호)이란 이름을 아는이는 별로 없다.


1927년 어느 여름날, 황해도 백천 여인숙에는  순회 악극단의 연극사들이

장마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을때 허물어진 옛 궁터인 개성의 만월대를  연상하며

잡초만 무성한 찾는이 없는 무너진 왕조의 애잔함과 민족이 처한 일제하의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처지를 비관하며, 만들어진 "황성옛터" 를 그해 가을 서울 공연에서 가수 이애리수를 통해

발표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거의 광적이 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王平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고  공연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1943년 평북 강계에서 '돌아온 아버지'란 연극 공연중

사십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夭折(요절)하고 말았다.

 

황성옛터의 작사가 왕평 묘를 들려보시려면 요기 클릭

 

[조양각에서 내려다 본 영천 전경)]

 

永川(영천) 出身(출신)으로 歷史(역사)의 人物(인물)로는

만고의 忠臣(충신) 포은 정몽주. 화약을 발명하여 왜구를 격파한

崔茂宣(최무선)장군. 조선초의 시인 泰齋 柳方善(태재 유방선). 세종때

대마도정벌에 큰 공을 세운 李順蒙(이순몽)장군. 임란  의병장을 대표하는 

湖搜 鄭世雅(호수 정세아). 시가 문학의 대가 老溪 朴仁老(노계 박인노).

梅山 鄭重器(매산 정중기) 등 많은 人物(인물)의 故場(고장)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역시 圃隱(포은)과 老溪(노계)가 아닐까 한다.

 

만고의 충신 圃隱(포은)선생은 고려 충숙왕 6년인 1337년,

임고면 우향동에서 아버지 정운관, 어머니는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라는

시조로 유명한 영천이씨 사이 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멸망과 함께 이성계 일파의

새 왕조 창업을 반대하다가 1392년 4월4일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 의해
選地橋(선지교)에서 살해되니, 나이 56세 였으며 , 피를 흘린 자리에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이름을 善竹橋(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 시가문학 3대 작가로 꼽히는 老溪(노계)선생은  조선 명종 16년인 1561년,

영천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을 맞은 것은 31살 때였는데 

그는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여 큰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을 맞아서는

수군 만호의 벼슬을 맡아 종군하면서 태평사를 지어 군사를 위로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