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忠祠(삼충사) 廟庭碑閣(묘정비각)과 茶川亭(다천정)

2015. 7. 24. 05:54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871-1번지

 

[三忠祠(삼충사) 廟庭碑閣(묘정비각) 일각문]

 

파계사로 가는 길에 늘 이곳을 지나친다.

들려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았지만, 주차할 곳도 마땅찮고 늘 문이 닫혀 있어서

지나치곤 하였는데, 이 날은 불법(?)주차를 잠시 해 놓고들려보기로 하였다.

 

[廟庭碑閣(묘정비각) 전경]

 

닫힌 문이 원망스럽기 하였지만, 그리 높지 않은 담너머로

튀어나온 돌담의 돌모서리를 밟고 올라서서 담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안내판과 三忠祠(삼충사) 廟庭碑閣(묘정비각) 전경]

 

어디서 담아야 더 많이 안까지 담을 수 있을까?

혹시나 다른 출입문은 없을까?

둘러보며 사진을 담기 시작하였다.

 

[안내판 글 내용]

[茶川亭(다천정) 일각문]

 

三忠祠(삼충사) 廟庭碑閣(묘정비각)으로 갈 수 있는

또 다른 茶川亭(다천정)쪽 일각문도 빈틈하나 없이 닫혀 있다.

 

마침 옆 건물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서, 다가가 공손히 여쭈어보았지요.

"사진을 찍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셔요. 이쪽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하며 흔쾌히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재실쪽에서 담너머에서 담은 전경]

 

현대식 건물인 그곳이 삼충사와 묘정비각과 다천정을 관리하고 지키는 재실이었다.

맞춤 맞게도 제가 간 그다음날 제사를 지내신다며 준비 중이었습니다.

 

"차 한잔 대접해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놓고 담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것도 감사한데...무슨 차까지나 절대 아니죠.^^

 

[재실담 너머로 담은 茶川亭(다천정) 전경]

 

이 정자는 慶州人(경주인) 崔東(최동률)이 제자들과 더불어 經史(경사)를 강론하기 위해 지은것이라한다.

崔東律(최동률)의 호는 茶川(다천), 壬亂時(임란시)의 義兵將(의병장)인 台洞(태동) 崔誡(최계)의 子(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그의 호 茶川(다천)을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홑처마 건물이다.

 

[茶川亭(다천정) 현판]

[茶川亭(다천정)]

 

현재의 정자는 1980년대에 犬齒石(견치석) 축대위에 방 3칸 대청 2칸의 현대식 구조로

새로 重建(중건)하였으며, 지묘동 776에 있었던 三忠祠(삼충사) 廟庭碑(묘정비)도 1995년에

이곳으로 移建(이건)하여 같은 境內(경내)를 이루게 하였다.

 

경주 최씨 시조 孤雲(고운) 崔致遠(최치원)의 문집

板刻本(판각본)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하며, 우리나라에서 유일본이라하네요.

 

[茶川亭(다천정)과 삼충사묘정비 일각문]

[茶川亭(다천정) 뜰의 노거수]

 

삼충사 일각문과 삼충사 문까지 친절하시게도 열어주셔서 안까지 둘러보게 해 주셨습니다.
 
"이곳까지 들리셨으니 보시게 해드려야지요." 하시면서...

참으로 고마우신 분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더 고마움의 마음을 전합니다.

 

[三忠祠(삼충사) 출입문]

 

崔氏三忠祠廟庭碑閣(최씨삼충사묘정비각)

崔認(최인), 崔誡(최계), 崔東輔(최동보) 등 삼숙질이

임진란에 창의하여 혁혁한 전공을 수립한 업적을 찬양한 충의사적비이다.

 

[三忠祠(삼충사)]

 

崔認(최인) 조선 중기의 의병(출생과 사망 년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음.)

자는 사인(士仁), 호는 한천(寒川) 선조 25년(1592) 2월 權應銖(권응수) 등 12인과 함께

烏江(오강) 琴亭(금정)에서 창의, 그해 4월 張夢紀(장몽기)와 함께 남쪽에서 밀려오는 왜적을 물리쳤다.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 郭再祐(곽재우)와 함께 창녕의 火旺山城(화왕산성)을 수비하였다.

대구 平川祠(평천사)에 배향되었다.

 

[三忠祠(삼충사) 내부]

 

義兵將(의병장) 崔誡(최계, 1567~1622 ) 武臣(무신)

본관은 慶州(경주), 字(자)는 士訓(사훈),

號(호)는 台洞(태동). 蓄洞(축동)이며 內禁衛(내금위) 宗沃(종옥)의 아들이다.

 

[三忠祠(삼충사) 내부]

 

崔東輔(최동보) 자는 子翼(자익), 호는 憂樂齋(우락재)

대구에서 출생하여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仲父(중부) 認(인). 현령인

季父(계부) 誡(계) 및 張蒙紀(장몽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慶山(경산). 永川(영천) 등지에서

복병전술로써 적과 싸워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 당시의 상황을 일기로 적은 '神瑩記(신협기)'가 있다.

후에 호조참판이 추증되고 대구의 平川祠(평천사)에 祭享(제향) 되었다.

 

[廟庭碑閣(묘정비각) 전경]

 

宣祖(선조, 25)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忘憂堂(망우당) 郭再祐(곽재우)와 합세,

義兵(의병)을규합하여 戰功(전공)을 세운 崔誡(최계)와 그의 중형 認(인) 및 장조카 東輔(동보)의 三叔姪(삼숙질)을

崔氏(최씨) 三忠(삼충)이라 하여 그 功績(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三忠祠(삼충사)를建立(건립)하고 이 碑(비)를 세웠다.

 

[廟庭碑(묘정비)]

[廟庭碑(묘정비)]

 

이 碑(비)는 純祖(순조, 28) 1828년 建立(건립) 되었고

오석으로 된 碑身(비신)은 높이 200㎝, 폭 99㎝, 두께 23㎝이다.

碑蓋(비개)는 황백색 높이 70㎝, 가로 130㎝, 두께 33㎝

 

[廟庭碑(묘정비) 龜趺(귀부)]

 

龜趺(귀부)는 높이 41㎝,화강암 용머리 方形(방형)으로가로 130㎝, 세로 140㎝이다.

 

[廟庭碑閣(묘정비각) 뒤쪽 家廟(가묘)]

[三忠祠(삼충사) 廟庭碑閣(묘정비각) 안쪽에서 담은 일각문]

[三忠祠(삼충사)쪽에서 담은 茶川亭(다천정) 옆 전경]

[茶川亭(다천정) 뜰에서 담은 三忠祠(삼충사) 전경]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망우당 곽재우의 의병세력과 합세하여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곳에 거주하였는데, 후손들이 최계와 다른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28년 중에 삼충사를 건립하였다.

 

순조 28년 1823년에 비를 건립, 1996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한다.

 

[茶川亭(다천정)에서 담은 일각문 전경]

 

들어올 땐 옆 재실쪽으로 들어왔지만, 활짝 열어주신 다천정 일각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자주 이곳을 지나다니며, 들리지 못한 마음의 숙제를 오늘 깨끗히 풀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