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朴仁永(박인영) 孝子旌門 (효자정문)

2015. 8. 6. 05:51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

 

 

[박인영 효자비와 효자정문 전경]

朴仁永(박인영)의 본관 竹山(죽산). 汝安(여안) 朴敏興(박민흥)의 아들이다.
英祖(영조) 26년(1750) 옥산리에서 태어났다.

 

 

[박인영 효자비와 효자정문]

어려서부터 행동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재덕을 겸비하여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영조 47년(1771) 과거에 급제하여, 通德郞(통덕랑)에 올랐으나
모친께서 병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약재를  구하여 탕약을 해드리며,
온갖 정성을 다하였지만, 모친이 생명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세 번 잘라
피를 흘려 넣어 모친의 수명을 며칠 간 연장할 수 있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지극히 애통하면서 상례범절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하여

장례를 마친 후 혼자 남은 부친을 위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부친의 봉양에만 힘썼다.


 


[통덕랑 죽산 박인영 효행비]

정려각 앞에는 1989년에 세운 박인영 효행비가 있다.
'通德郞竹山朴公仁永孝行碑(통덕랑죽산박공인영효행비)'


 

 

[孝子旌門 (효자정문)]

그 후 부친이 노환으로 병석에 눕자 손수 약 수발을 하였고, 매일 부친의 변을 맛보아 가며 병세를 판단하였다. 

부친이 운명할 즈음, 모친을 위해 잘랐던 손가락 흉터에서 저절로 鮮血(선혈)이 나와 부친의 수명을 연장케 하여 주위에서 모두가 경탄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마친 후 3년간 비바람을 무릅쓰고 시묘에 정성을 다하였다.

 

 

[박인영 효자정문 편액]

그후 부친과 동갑이던 외숙 李敏器(이민기)의 와병 중에도 친부와 같이 변을 맛보아가며 시탕갈력하니 범인이 따를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根天之孝(근친지효)이며 格天之誠( 격천지성)이라 하였고 세인을 능히 경탄케

하였으므로 향리의 士林(사림)이 이의 효행지절을 숭앙, 연명 상소하여 순조 19년(1819)년 정려문이 내려졌다. 

용인군 외사면 고안리에 그의 묘소와 정려문이 전한다.


 

[정려각]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사방 모두 단칸으로 구성한 초익공식 겹처마 맞배지붕 형식이다.
앞면은 중방 위아래로 홍살을 넣었고, 측면과 뒷면은 벽체로 막았다.

낮은 기단에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 머리에는 초익공을 두었고, 지붕은 부연을 둔 겹처마로 구성하였으며,
처마에는 암수막새를 사용하였다. 맞배지붕 측면에는 방풍판을 가설하지 않았다.

정려각 내부에는 뒷면 벽에 정려문 편액을 걸었다.
정려각 주변에 적벽돌 담장을 둘러놓았는데,
전통 형식에서 벗어나 정려각의 경관을 손상시켰다. 

박인영 효자 정려각 남쪽 전답 건너편에 어제 소개한 연안이씨 열녀 정려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