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경주) 蘿井(나정)

2015. 10. 16. 06:31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塔洞(탑동) 700-1
사적 제245호

 

 

[蘿井(나정) 안내판]

나정입구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비스듬이 열린 문을 통해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엔 안내판만 하나 서있을 뿐 넓은 공지만 있고 멀리 소나무 숲이 보인다.

 

[안내판 글 내용]

 

[蘿井(나정)]

'三國史記(삼국사기)'와 '三國遺事(삼국유사)'

이 우물터에서 신라 시조 朴赫居世(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誕降傳說(탄강전설)이 있다.

기원전 69년 어느 날 高墟村長(고허촌장) 蘇伐公(소벌공)이 陽山(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 속에서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한다.

이상히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닐고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혁거세'

이름하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그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13세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뽑았으며 나라 이름을 徐羅伐(서라벌)이라 하였다.

 

 

[시조왕탄강비]

이곳에 있는 비석은 조선  純祖(순조) 2년(1802)에 박혁거세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검은 석비앞에는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어떤 설명도 없다.

우선 보존해 놓아두고 다시 정리를 하려 하는지

알 길 이 없으나, 그냥 방치해 둔 것 처럼 보여 안타까웠다.

 

 

 

경주 나정은 신라시대 소위 우물터로 알려져 왔으나 한 고고학자가
우물이 아니라 기둥주초 시설이라는 견해를 제기해 논란이 되고 있다고도 한다.
고고학적 조사결과 현재의 나정 유적에 신라시대에 우물이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현재의 나정유적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박혁거세가 誕降(탄강)한 곳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라시대에 神聖(신성)공간으로 활용된 그 나정과는 다른 곳이라는 뜻이다. 

이 연구관은 그 근거로 조사단에서 신라시대 우물터였다고

지목한 구덩이는 우물이 아니라 모종의 건축물을 지탱하는 주기둥이 있던 곳이라고 해석했다. 

 

이와 같은 발굴단 견해를 따른다면 7세기말 팔각형 건물지가

들어서기 전 지금의 나정유적에는 우물을 중심으로 목책과 같은 담장을

원형으로 두른 시설물이 있었던 셈이 된다.


이는 무엇보다 무문 전(무늬 없는 벽돌)과

돌무더기가 바닥에서 확인된 점에서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즉 이들은 나무기둥을 받치기 위한 시설물이라는 것이다.

 

[발굴전 경주 나정의 모습 문화재청 자료]

지금의 나정이 신라시대의 그 나정이 아니라고 해도

초기 철기시대 이후 제사시설로 매우 중요하게 활용됐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라인들이 시조탄강지로 인식한 蘿井(나정)이 우물이 아니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첫째 나정이 우물이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을 우물로 인식한  것은 조선시대 이후일 뿐이며, 따라서 나정이

우물임을 주장하려는 사람들은 나정이 우물이라는 결정적인 근거를 먼저 대야만 한다. 

천상에서 내려온 박혁거세라는 남자와 알영정이라는 우물에서

솟아난 閼英(알영)이라는 여성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설정돼 있다.

박혁거세는 양을 대표하는 天()이며 알영은 음을 대표하는 地()로 간주되고 있다.

백마가 천상에서 실어온 자주색 알을 깨고 나정이란 곳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처음으로 씻긴 곳이 동천(東泉)이란 곳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나정이 우물이 아니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나정을 우물로 본다면 나정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난 아이를

다른 우물(동천)로 데려다가 씻길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井(정)이라는 글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한다.
우물이란 뜻도 있는 반면에,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땅을 지칭하기도 한다.

저잣거리를 市井(시정)이라 하는 까닭은 그곳에 우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거리가 十(십)자 모양으로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의 周()나라에서 시행했다고 하는 이상적인

토지 구획제도를 井田制(정전제)라고 한 까닭도 실상 우물과는 하등 연관이 없다.
그 구획된 땅이 바둑판 모양을 닮은 데서 비롯된 명칭일 뿐이다.

따라서 蘿井(나정)이란 말은 蘿()라는 우물이라는 근거가

상실된 이상 蘿()라는 모종의 식물(혹은 나무)과 관련 있는 구획된 땅으로 보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지금의 경주 나정에서 우물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곳을 신라시대 나정이었음을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