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고택

2021. 5. 27. 06:00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이상화 고택쪽에서 담은 서상돈 고택 전경]

 

한때 (구)고려예식장 일대에 30층 주상복합아파트 신축사업으로

위기를 맞았던 서상돈 선생 고택은 아파트사업주인 (주)L&G측의 협조와

대구시, 고택보존운동본부의 노력으로 복원,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서상돈 고택은 상화 고택의 대문 앞 길 하나를 두고 높다란

아파트 밑에 위치해 있지만, 높낮이의 묘한 조화를 이루어고 있다.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우측 안쪽으로 정식 대문이 있지만, 그곳은 닫혀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이곳으로 고택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날 그 때의 만세소리 함성이 들려오는듯 하지 않나요.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리신 어르신님들의

행적을 뒤돌아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안채 전경]

 

徐相燉(서상돈. 1850~1913)은 천주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시작해 큰 부자가 된 대구 출신의 민족자산가이다.

달성서씨인 서상돈의 집안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전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서상돈의 고조 할아버지 徐光修(서광수)는 1784년 (정조 8) 무렵 5명이 아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지만 이듬해 1785년 3월의 천주교 박해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정면에서 담은 안채 전경]

 

서상돈은 1980년 10월 17일(음력) 경상북도 김천의 마잠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서철순은 서상돈이 9세 때인 1859년(철종 10)에 돌아가셨고, 가족들의 생계는

대구 새방골의 죽전에서 외할아버지 金厚祥(김후상)의 보살핌 속에 꾸려나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상점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해야만 했던 서상돈은

18세 무렵 당시 대구 천주교회 원로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등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褓負商(보부상)을 시작하였다.

 

[댓돌위의 검정고무신]
[안채 사랑방]

 

부지런히 일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그는 35세인

1885년(고종 22)에 이미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린 大商(대상)이 되었고,

한 해 3만 석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만큼의 큰 부자가 되어 대구의 유력한 경제인으로 부상했다.

 

[안채 대청마루]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격심해지면서 큰아버지 서인순,

삼촌 서익순의 고난과 순교를 목격한 뒤부터 근검절약하며 천주교의

전교활동과 구제. 자선 활동에 전념하기로 굳게 결심한다.

 

[안방]

 

1885년 로베르(Robert, 김보록 金保祿) 신부가 경상도 신나무골

교우촌(지금의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으로 옮겨 오면서부터

서상돈은 사촌 여동생 서마리아와 함께 교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부엌]

 

1891년 12월의 대어벌 임시성당 건축,

1897년 계산동의 성당 건축 등에 서상돈은 기부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부엌]

 

또 1911년 바티칸 교황청이 주교 소재지로 전주와 대구를 놓고

고심하고 있을때, 운동을 통해 대구로 낙점될 수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시 주교관 부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안채]

 

서상돈은 또한 교육사업을 지원하고 그 운영을 도왔다.

1899년 계산동 성당 부속건물에 한문서당인 해성재(海星齋)를

설립하였으며, 1908년 봄에는 이 해성재를 성립학교(聖立學校)로

바꾸어 개교하였다.

 

[안채쪽에서 담은 사랑채 전경]

그리고 1910년 성립 여학교가 개설될 때 재정을 지원하고 운영에 참여했다.

 

[사랑채 내부]

 

1905년 대구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를 설립했다.

1906년에는 교과서, 계모 오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하기 위한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를 조직하기도 했다.

 

[사랑채 내부]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되었을 때에도 서상돈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사랑채 대청]

 

1906년 대한제국정부는 1,300만 원이라는 거액의빛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빌려쓰면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사랑채 내부]

 

이때 서상돈은 일본 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인식하면서,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사랑채 내부]

 

이 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고 최초 민중대회인

군민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관리동]

 

이것을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신분을 초원한 전국의 모든 남녀노소들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해외 한인들에게까지도 전파되었다.

 

[안채쪽에서 담은 대문 전경]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국권회복을 위해 온 국민을 단결시킨 자발적인 사회운동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지대하다.

 

[대문]

 

위에 적어 올린 글들은 서상돈 고택에 들렸을 때

가져온 팜플랫의 글들을 그대로 적어 올린 것입니다.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자료를 수집하여 짜집기 하는것 보다

제일 확실하게 소개가 될것 같아서 적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읽어보시고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료사진]

 

이곳에 올린 자료들은 자세히 보시고 싶으시다면

클릭하셔서 원본보기로 보시면 더 자세히 보실 수 있을거에요.

 

[ 서상돈 생가 모형과 자료 전경]
[안채와 사랑채 전경]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에 전념해 실업진흥을 통한 민족실력 양성에 애쓰다가

1913년 6월 30일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셨다.

 

정부는 두 사람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김광제 선생과

1999년 서상돈 선생에게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