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과정의 변천

2021. 3. 3. 06:00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대한민국 교육과정의 변천]
[전시실 내부 전시자료 전경]
[1945 / 교수요목의 시기]

 

우리나라 교육 목표인 '홍익인간'의 정신을 바탕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교육을 강조하였다.

교과가 사회생활과 공민. 지리. 역사. (일반과학 물리. 화학. 생물), 실과와 수공(가사. 재봉. 수예 실업 등)

미술(습자. 도화)로 통합되어 이후의 교과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차 1954 / 교육과정의 시기]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체계적인 교육과정이라는 점에서 제1차 교육과정으로 불린다.

교과 중심, 생활 중심을 지향하였으며 광복 후의 사회적 혼란과 6.25 전쟁으로 인해

반공. 도의. 실업 교육을 강조하였다.

 

[2차 1963 / 교육과정의 시기]

 

생활 중심 교육과정으로서의 성격을 표방하며 교육과정 내용 면에서

자주성, 생산성,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부분 개정을 통해 반공, 도덕 생활을

강화하고, 완전한 한글 사용을 위해 한자 교육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3차 1973 / 교육과정의 시기]

 

학문 중심 교육과정으로서, 국민교육현장 이념 구현을 기본방향으로 삼았다.

'반공. 도덕 생활'이 없어지고 '도덕'과가 교과로 독립하였다.

중등학교에서는 '도덕', '국사'가 교과로 독립하였고,

남학생은 '기술'을, 여학생은 '가정'을 배웠다.

 

[4차 1981 / 교육과정의 시기]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미래 지향적 교육과정이라는 인식을 반영했다.

수업 부담을 줄이고 여가 활동 시간을 늘려 전인 교육을 강조하였다.

 

특히 초등학교 1~2학년에서 교과 간의 통합을 시도하여

통합교과서(바른생활. 즐거운생활. 슬기로운생활)를 간행하였다.

 

[5차 1987 / 교육과정의 시기]

 

교육과정의 적정화, 내실화, 지역화를 목적으로 개정된 교육과정이다.

기초 교육과 정보화 사회 대응 교육이 강화되었으며, 초등학교 1학년에

'우리들은 1학년'을 교고하로 독립시켰다.

 

[6차 1992 / 교육과정의 시기]

 

국가 수준에서 전국 공통의 일반적 기준만 제시하고, 각 학교에서

실시되는 교육과정은 시. 도 교육청과 학교의 협력을 통해 결정하였다.

 

초등학교에서 학교재량시간을 신설하고 산수를 수학과로

교과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영어를 정규 교과로 신설하였다.

 

[7차 1997 / 교육과정의 시기]

 

학교급별 구분을 없애고 1학년부터 10학년(고등학교 1학년까지

10년 동안의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과 고등학교 2. 3학년의

선택중심 교육과정으로 구성하였다.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했으며, 학년제와 과목군 도입에 따라

'자연' '과학'으로 '영어''외국어(영어)'로 명칭 변경한 점이 특징이다.

 

[2007~2015 / 개정 교육과정 시기]
[전쟁교과서]

 

4. 우리의 힘으로

 

토요일 날 아침 공부가 시작되려는 때이었습니다.

선생님 앞에는 아이들이 모아들인 국군 아저씨에게 보내는

위문품이 수묵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너희들한테서 위문품이 이렇게 많이 모일 줄은 몰랐구나."

 

 

전시생활 1-1 비행기 / 국민학교 1-2학년 / 문교부

전시생활 1-2 탕크 / 국민학교 1-2학년 / 문교부

전시생활 1-3 군함 / 국민학교 1-2학년 / 문교부

 

 

얘들 아, 나오너라.

우리들 도 나아가자.

다 같이 발 맞춰,

앞 으로, 앞 으로, 앞 으로.

 

 

전시생활 3-1 / 우리 나라와 국제연합 / 국민학교 5,6학년 / 문교부

전시생활 3-2 / 국국과 유엔군은 어떻게 싸워 왔나? / 국민학교 5,6학년 / 문교부

전시생활 3-3 / 우리도 싸운다 / 국민학교 5,6학년 / 문교부

 

[돌아오지 않는 야구소년들]

 

야구공 잡던 손 총을 들고 떠나다!

 

1950년 6월 18일 열린 제5회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한 대구상업(현 상원고)

야구부 선수들. 열렬한 환호 속에 학교로 돌아온 그들은 며칠 뒤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우승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

 

세 선수의 스포츠 정신은 그라운드가 아닌 전장에서 애국정신으로

발휘되었고, 나라를 지켜낸 그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