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花巖寺(화암사)

2015. 8. 25. 05:57문화산책/사찰 탐방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202

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51호

 

 

[花巖寺(화암사)보호수]

 


[花巖寺(화암사) 보호수 2]

 

[보호수 안내팻말]

[花巖寺(화암사) 입구 전경]

 

화암사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삼국시대의 古刹(고찰)이라 한다.

화암사는 오서산 중턱에 위치하고 백제때 창건하였고 건물은 화순옹주의 부군이자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로 월성위인 김한신이 재건하고 중수한 것으로 추사선생 댁과는 인연이 깊은 절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조선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

別賜田(별사전)으로 분급된 일대의 田土(전토)에 포함되어 그 一門(일문)에 세습되었다
영조 28년(1752) 월성위가 중건하였으나 그후 대웅전은 燒失(소실)되고 요사채만 남아있다.
 
추사선생은 이곳 烏石山(오석산) 화암사에서 불교에 정심하였고 현종 12년(1846)에

제주도 적소에서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重建(중건)을 지시한 사실이 있었다 한다.

 

 

[華巖寺(화암사) 현판]


[花巖寺(화암사)]

화암사는 추사 불교의 원천이다.
추사고택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烏石山(오석산)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다.

증조부인 월성위 때부터 추사 집안의 願刹(원찰)이었다.
원찰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개인사찰이다.

추사는 유학자이면서도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조선시대에 불교는 無父無君(무부무군)의 이단사상이었고,  승려는 기생, 백정, 광대와 함께 팔천(八賤)에 들어가는 천민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추사 정도 되는 일급 양반이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추사는 구암사의 白坡(백파)선사와 三種禪(삼종선) 논쟁을 통하여 祖師禪(조사선)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선의 세계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가 하면 금강경을 호신용 부적처럼 항상 휴대하고 다닐 정도였고,

차로 유명한 전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도 차와 불교를 매개로 특별한 우정을 맺었다.

이런 걸 종합하면 조선시대를 통틀어 명문가의 유학자 신분으로 추사처럼 불교에 깊이 들어간 인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花巖寺(화암사) 현판글씨]

추사가 이처럼 불교를 알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그걸 추적하다 보니까 화암사가 나온다. 

 

집안에 개인 사찰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자연이 추사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화암사를 출입하면서 불교 분위기에 접했고 여러 불경을 보고 禪(선)도 익혔던 것 같다.

 

 

[보수중인 대웅전과 약사전 주변 전경]

 

한창 새로 짓느라 공사중이였다.
공사하는 곳을 피하여 담아오느라 마음놓고 담지 못하여 아쉬웠지만,

둘려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밖에...곳곳에 짓다만 재료들이 쌓여있고

 

 

[대웅전과 약사전]

말끔하게 단장한 대웅전과 약사전 모습
마침 아침예불 중이셨던지 은은한 목탁소리와 염불 소리가
음각을 보기위해 뒷쪽으로 난 길을 오르는 우리들과 함께 동행해주는 것도 같았다.

 


[대웅전 옆 탑과 부처상]

화암사 뒷산의 이름이 烏石山(오석산)인데 까마귀 烏(오) 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돌을 깨보면 바위 속이 검기 때문이고, 그 바위가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이 병풍암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조산인 팔봉산에서 고택이 있는 용산까지 20리를 내려온 구절비룡의 산줄기 가운데서

유일하게 바위가 돌출되어 岩氣(암기)가 강하게 발산되는 곳은 이곳 오석산의 화암사 대웅전 뒤편의 병풍암이라 한다.

 


[김정희 글씨로 음각되어진 바위와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화암사 암벽의 추사글씨 천축고선생댁(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51호)]

 

서예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선생(1786~1856)의 친필이다.

추사가 직접 화암사 대웅전 뒤편의 암벽에 남긴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
'詩境(시경)'이라는 글자는 그러한 특별한 인연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자료다.

天竺(천축)은 서역의 인도를 말하고 古先生(고선생)은 부처를 유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교 사찰을 유교식으로 번역하면 바로 '天竺故先生宅(천축고선생댁)'이된다. 

'天竺故先生宅(천축고선생댁)'이란, 불교와 유교가 어울러진 집이라는 뜻이라 한다. 

 

 

[암벽의 추사글씨 詩境(시경)]

'詩境(시경)'이란 좋은 경치 뜻이라 한다.
암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둘 다 활달하고 거침없는 필체로서 秋史(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가 선명하게 암각되어 있다.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병풍암 전경]

암벽은 대웅전 뒤편에 병풍처럼 서 있는데, 가로가 30m 세로는 3∼4m 정도의 크기다.
절에서도 이 바위를 병풍암이라 부른다.

 

 

 

이 밖에도 화암사 뒤편에는 암석들이 많이 있다.

 

 

 

나무 와 나무 사이에 경계처럼 자연석이 세워져 있다.

누군가 세운것일까? 아니면 자연적으로 세워진것일까?

 


[뒤편에서 본 화암사 전경]

이 병풍암 밑에는 나무로 만든 평상이 하나 놓여 있는데,
절에서 중요한 천도재를 그 병풍암 앞에서 지내면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해서 그곳에서 지낸다 한다.
이와 같이 이 일대는 조선 후기의 사상가요, 정치가이며 예술가였던 김정희 선생의 숨결이 가득 차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