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1번지 願堂庵(원당암)

2015. 8. 22. 06:04문화산책/사찰 탐방

 

소재지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願堂庵(원당암) 출입구]

사진으로 보기에도 좁아보이는 아름드리 두그루의

나무 사이를 통과해서 원당암으로 들어서면 곧장 주차장이 보인다.

원당암은 해인사 맞은 편 봉우리, 비봉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당이란 '소원을 빌려고 세운 집'이란 뜻이라한다.

[願堂庵(원당암) 안내판]

원당암은 해인사 1번지 같은 상징적인 암자다.
해인사와 형제처럼 역사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당앞에 보물 518호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는 석탑과 석등에도 암자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원당암 안내판 글 내용]


신라 哀莊王(애장왕)은 부처님의 가호로 공주의 난치병이 낫게 되자
順應(순응), 理貞(이정) 두 대사의 발원에 따라 국력으로 海印寺(해인사)를 창건하게 된다.

 

당시 국왕은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에 들어와 불사를 독려하면서 국정을 보았으므로

원당암을 수도 서라벌의 북쪽에 위치한 궁궐이라는 뜻에서 北宮(북궁)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이것이 바로 오늘의 願堂庵(원당암)이다.

주차장에 자를 세우고 친구들이랑 願堂庵(원당암)으로 들어섰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선방]

창건당시에는 이 곳의 산 모양이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
飛鳳山(비봉산) 기슭에 있다하여 鳳棲寺(봉서사)라 이름하였다.

암자가 다시 활기를 찾게 된 것은 慧菴(혜암)스님이 머무른 이후부터 였다고 한다. 

[願堂庵(원당암)]

혜암스님은 해인사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수 있는
해인총림방장(93~96년)스님을 지내시고 1999년 4월에 조계종 제10대
종정스님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원당암에서는 스님들과 똑같이 일반인들도 여름과 겨울에
한철씩 安居(안거)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국내 재일의 재자불자 참선도량으로 변모되었다.

[願堂庵(원당암)]

중앙에 보이는 큰 바위같은 것은 봉황이 날개를 편 몸채 부분인 곳으로
언덕위에는 雲鳳橋(운봉교) 전망대가 세워져 있는 곳이다. 

[영당에서 바라본 전경]

 

혜암대종사께서는 참선수행은 살아 있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영혼도

이 좋은 자리에서 참선 수행하여 그 영가들이 서방정토에 가셔서 업장이 소멸되고 다시 환생하여

맑고 깨끗한 영혼들이 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면 이 곳에서 극락정토가 이루어지지 않겠냐는 발원으로
영가들의 선방인 영단을 따로 크게 마련하였다.

[염화실]

혜암 대종사께서는 6개월동안 불도 때지 않고 물과 잣나무 가루만 먹으며 서서 수행하셨다.
범인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초인적인 수행력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던 혜암 대종사는

후학들의 경책하는 독특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전국의 제방선원을 다 다녔지만, 비구니가 있다는 이유로

수덕사 선방에는 가지도 않을 정도로 색마를 철저히 경계하였다한다.

 

스님은 특히 조실스님에게도 거침없이 직언을 하며 범거량을 벌여 당시

스님으로부터 "혜암은 조실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별칭들 듣기도 하였다.

 

스님의 근검절약 정신도 성철스님 못지 않으셨다.
대표적인 예로 편지봉투 재사용이다.
스님은 편지나 소포가 오면 함부로 찢거나 버리지 못하게 했다.
편지봉투와 소포는 곱게 뜯어 안쪽을 바깥으로 내 다시 사용했으며,
소포를 묶었던 노끈도 곱게 풀어 재 사용하였다.

또 간소화된 승복 사용을 엄격히 금했으며, 정좌불와 수행을 하신

까닭에 평생 이불과 베게가 없는 스님으로도 유명하였다.

[보광전 보물  제518호]

원당암에 있는 중요 유물들은 대체로 진성 여왕대에 와서 위홍을 위한 원당으로

지목되면서부터 이곳이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곳에 현존하는 중요 석조 유물로는 보물 제 516호
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해인사원당암다층)및石燈(석탑)석등 그리고
배례석을 비롯하여 보광전의 축대 등이다.

보광전 전방에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석탑은 특이한 靑石塔(청석탑)이다.

이같은 청석탑은 국내에서 흔치 않는 이른바 점판암 계통의 석재를
이용한 것으로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석재이다. 

원당암의 주된 법당인 보광전의 축대 이 축대는 보광전 전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특이한 작품으로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보기 어렵다.
그 높이는 약 40cm에 불과한 나지막하지만 정성이 스민 품격있는 작품이다.

보광전의 축대에까지 안상과 연화문을 새겨 존엄을 표현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 것 역시 어쩌면 진성 여왕의 여성적 섬세함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청석탑을 비롯하여 석등, 배례석 그리고 보광전의 축대에 이르기까지 혜성대왕 원당이

곧 진성여왕의 願刹(원찰)이었던 시대적 배경속에서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이라한다.

[微笑窟(미소굴)로 오르는 돌계단]

1946년 가야산 해인사에 출가한 날로부터
長坐不臥(장좌불와, 눕지 않고 정진)와 日中一食(일중일식, 하루 한끼)으로
수행하신 조계 종정 '혜암 성관 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이다.  

오로지 위법망구의 두타 고행정진으로 참선수행에만 몰두해 온 본분종사이며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승이다.

일생을 청정한 수행자로 올 곧게 살아온 혜암스님은 성철 방장의 뒤를 이어 해인총림의 방장을 역임하였다.

[미소굴 입구]

평소,'가야산 대쪽'이라 불릴 정도로 원칙과 소신이 뚜렷하여 당시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1994년 조계종 개혁불사와 1998년 조계종 종단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한국 불교계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하셨다.


[미소굴]

혜암스님의 유품과 사리를 전시해 놓은 미소굴 2001.12.31 입적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스님이 입적하셨던 3칸 황토벽의 '미소굴'에서 혜암스님의 유품과 금빛, 옥빛의 사리를 친견할 수 있다.
금빛 사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후 처음나온것이라고 한다.


[미소굴 현판글씨]

[미소굴]

'공부 하다 죽어라'

공부하다 죽는 것이 사는 길이다
옳은 마음으로 옳은 일 하다가 죽으면 안 죽어요.

-慧菴(혜암) 대종사 법문 중에서-

 

혜암종사가 살아 생전 수많은 보살,제자들에게 설파한 화두였으며, 또 한 이승에서의 마지막 열반송이셨다.
 

[혜암스님]

1920년 전남 장성군 덕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스님은 16살 되던 해에 일본에 유학 해,

그곳에서 조사어록을 보다가 문득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대목을 읽고 크게 발심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한다.
 
2001년(82세) 12월 31일 오전,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因果(인과)가 歷然(역연)하니 참선 잘해라" 당부하신 후  편안히 열반에 드셨다.

 

[수행자의 삶]

[혜암스님에 대한 글 내용]

[雲鳳橋(운봉교)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飛翔(비상)하는 鳳凰(봉황)의 모습을 하여 가야산의 雄妙(웅묘)한 精氣(정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야산 최고의 전망대가 바로 이곳 雲鳳橋(운봉교)이다.

 

이 운봉교에서 왼쪽으로 보면 가야산 정상이 묘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바로 눈앞에는 해인사 큰법당과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각 등 해인사의 전경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원당암에서 보면 풍수에서 말하는 좌청룡과 우백호, 그리고 案山(안산)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다.

 

가야산의 靈力(영력)이 산 정상에서부터 흘러내리다가 응집된 자리에 해인사 큰 법당과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비봉산의 봉황이 가야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힘을 양 날개로

안으면서 봉황의 눈은 여기서 직선으로 큰법당과 장경각을 응시하고 있으니 팔만대장경이그 숱한 외침으로 부터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언덕위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 서서 상왕봉등 가야산과 해인사 등을 바라볼 수 있다.

[시민 선방]

봉황이 알을 품는 명당자리에 세워진 달마선원 해인사 원당암의 달마선원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0대종정 慧菴大宗師(혜암대종사)께서 재가불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하기 위해 108평 규묘의 達磨禪院(달마선원)을 세우고 재가불자들도 출가승려와
같은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 곳이다.

혜암스님께서 생전에 재가불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치려고 지은
시민선방이며, 1996년 가을부터 이곳에 머무시며 대중에게 참선을 지도하셨다.
재가불자라 함은 승려가 되지 않은 일반인 중에 불교를 믿는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날이 흐리고 오락가락 가는 비가 내려...사진이 좀 흐렸습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미소굴 전경]

원당암은 해인사 창건을 위한 기초 작업장의 역할을 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본절인 해인사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또 역사가 오랜 만큼 풍부한 사적과 더불어 몇 차례의 중수 기록을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세조임금 때에는 학조대사가 오랫동안 주석했고,
철종 3년 곧 서기 1852년에는 우룡스님이 중수하였으며,
고종 11년 곧 서기 1874년에는 비구니인 성주스님이 또 중수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인사]

雲鳳橋(운봉교)에서 바라본 해인사 전경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伽倻山(가야산) 서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도사(불보사찰) 송광사(승보사찰) 와 더불어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선 원, 강원, 율원을 함께 갖춘 총림이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800-809)때 중국으로 구도 의 길을 떠났다 돌아온 順應(순응)이

가야산에서 정진하다 창건에 착수했으며 순응의 뒤를 이어 利貞(이정)이 완성했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으로
화엄의 철학과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 이다.

부설기관으로 1993년에 설립한 '장경연구소'가 있고 문화재로는
팔만대장경(국보 32호) 장경판고(국보제52호) 석조여래입상(보물제264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제528호) 반야사 원경대사비(보물 제128호)등 이 있다.


[丁字(정자)]

雲鳳橋(운봉교)에서 오른쪽 건너편 산 중턱에 있는 정자

[풍경과 처마밑으로 보이는 석탑]

본당인 보광전이 수리중이어서, 석탑의 모습을 담지 못하였기에
멀리 작게 보이지만 풍경이 일렁이는 처마밑을 통하여 담아보았습니다.

이번길은 친구랑 동행을 하여 간 길이라 오랫동안 머물며 이곳저곳 둘러보지 못하였다.
몇번씩이나 다녀온 곳이긴 해도...해인사본당에도 들리고 싶었지만,
지나쳐 원당암만 들려본 후 되돌아 내려왔다.

친구와 함께해서 좋은점과 남편과 함께해서 좋은점 나쁜점..
세상 이치가 그런가봅니다. 다 좋을 수는 없겠지요.^^

해인사는 누구나 들릴 수 있겠지만,
원당암은 들리기 쉬운 곳이 아닐것 같아
사진과 함께 친구도 등장시켜가며, 올려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