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9. 06:09ㆍ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25-11
[무진암 입구 극낙교 전경]
무량사 매표소가기전 좌측에 극락교를 건너면
김시습 부도와 무진암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자리하고 있다.
[설잠 김시습 부도 전경]
[무량사 김시습부도 안내글 내용]
[설잠 김시습 부도 출[입구 전경]
부도군은 전후 2열로 모두 9개의 부도가 배치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8각 願堂形(원당형) 부도가 4기, 石鐘形(석종형) 부도가 4기,
石塔形(석탑형)부도가 1기가 있다.
팔각원당형 부도는 앞줄 세 번째의 김시습부도를 제외하고,
2개는 높이가 각각 185㎝, 196㎝인데, 주인을 알 수 없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1기는 1917년에 조성한 것으로 淸信(청신)
명이 새겨져 있다.
다음 석종형부도는 모두 그 주인을 알 수 있는데,
앞줄 우측 첫 번째가 조선시대 승려로 경주 석굴암에서
해남 대륜사의 천불상을 조성한 화원인 翠竹堂(취죽당) 妙安(묘안)이고
다음으로는 標月堂大師(표월당대사), 楓溪堂(풍계당), 淸虛堂(청허당)이다.
[청간 매월당 김선생 碑 앞면]
김시습의 자 悅卿(열경)이며 호 梅月堂(매월당), 법호 雪岑(설잠)
시호 淸簡(청간). 生六臣(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江陵(강릉)이다.
그를 기인, 광인이라 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세종 1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종 24년 59세의 나이로 충청도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청간 매월당 김선생 碑 뒷면]
조선 500년 역사 속에서 천재중의 천재인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1435년에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한 번 배우면 곧 익힌다'하여 이름도 시습으로 지어진 인물이다.
김시습이 가진 뛰어난 재주는 대궐에까지 알려져 세종대왕이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린 바 있다.
"내가 친히 그 아이를 불러보고 싶으나 일반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 그러니,
그 가정에 권하여 잘 감추어 교양을 쌓도록 하고, 그의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그때부터 그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 한다.
[김시습 선생 부도와 주변 부도]
그처럼 어릴 적부터 명성이 남달랐던 김시습이지만 벼슬길에 나설 운명은 아니었다.
김시습의 나이 21세가 되던 1455년에 세조가 단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김시습은 조정에서 벼슬을 살았던 신하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절개를 지킬 필요는 없었으나, 불의의 소식을 들은 젊고 순수했던
21세 김시습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몇 날 며칠을 통곡했다.
그러다 돌연 서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나서 승려의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영월로 쫓아 보낸 뒤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의 반인륜적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던 끝자락,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한동안 지내며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리고는 "뒷날 반드시 나, 김시습을 알아줄 자가 있으리라"면서 그 책을 석실에 감췄다.
당대 현실과 화해할 수 없던 자신의 고뇌, 그리고 한번도 펼쳐보지 못했던
자신의 꿈을 기이한 이야기에 은밀하게 담아두었음을 짐작게 하는 일화이다.
[설잠 매월당 김시습 부도 전경]
그는 지금의 개성인 송도를 기점으로 관서 지방을 4년간에 걸쳐 유람한다.
그리고 공주 동학사에 머물던 중인 1456년 6월, 폐위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일으킨 단종 복위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고 곧바로 서울로 달려갔다.
하지만 김시습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종 복위사건의 주모자였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 등이
죽임을 당했고, 김시습은 그들 중 몇 사람의 시신을 한강 남쪽인 노량진의 언덕배기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김시습은 그의 나이 쉰아홉인 성종 24년(1493)
2월 어느 날 무량사에서 쓸쓸히 병들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였으므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해두었다고 한다.
그러다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는데, 김시습의 안색이 생시와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였고,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만들어 세웠다 전해진다.
[翠竹堂(취죽당) 妙安(묘안)]
[매월당의 부도와 함께 자리한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도 / 애니메이션 편집]
[五歲金時習之墓(오세김시습지묘)]
[五歲金時習之墓(오세김시습지묘) 碑(비)]
'세 살에 시를 쓰고 다섯 살에 소학을 뗀 영특한 아이가 있다'
는 소문을 듣고 세종대왕이 다섯 살 김시습을 궁궐로 불렀다.
어린 김시습은 세종 앞에서 한시를 써내려 갔습니다.
지켜본 세종은 아이를 다섯 살 천재가 크게 되라는 뜻으로
'오세'라고 불렀고 그때부터 김시습은 '五歲(오세)'라는 별호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의 승탑 앞에 '오세 김시습의 묘'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승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
조선 시대의 부도들이 석종형으로 간소화된 것과는 달리
조선 중기에 세워졌으면서도 초기의 부도 모습인 팔각원당형을 하고 있다.
오래 전 폭풍우로 쓰러지면서 김시습의 사리 1점이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리는 최근까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불교계와 무량사의
끈질긴 요청으로 2017년 9월 16일에 무량사로 移運(이운)되었다 한다.
[標月堂(표월당) 大師(대사) 탑]
[매월당 김시습 부도 전경]
평생 전국을 전전하며 지내던 김시습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런 최후는 자신이 젊은 시절 썼던
'금오신화'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너무도 닮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도 모두 깊은 산속으로 홀연 자취를 감춰 버리거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는데, 김시습은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楓溪(풍계)]
[출입구 뒤쪽에서 담은 김시습 선생 부도 전경]
[무량사 부도군 향토유적 56호]
선생은 생육신의 한 분으로 21세 때에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되자 불문에 귀의, 만년을 이 무량사에서 보내고 입적하였다.
어제 소개한 무량사 절에는 그의 자화상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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