砥柱中流碑(지주중류비)

2018. 10. 24. 05:46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1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입구 쪽에서 담은 지주 중류비 안내판 전경]

 

하늘은 맑고 솜털 구름이 잔잔하게 깔린
푸른색과 흰색의 조화가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날 답사를 나셨다.
대구의 하늘보다 더 맑고 푸른 하늘 답사를 해서 즐겁고
날씨까지 부조를 해 준 것 같아 마음은 둥둥 하늘을 나른다.

 

[안내판과 뒤쪽 지주 중류비 전경]

 

다시 또 하늘을 담아본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 풍경이 자꾸만 담게 한다.

 

[안내판 글 내용]

[설명 글 내용]

[안내판 쪽에서 담은 지주 중류 비각 전경]

 

안내판에 적혀 있듯이 이 비석은 조선 宣祖(선조) 20년(1587)
仁同縣監(인동 현감) 柳雲龍(유운룡)이 冶隱(야은) 吉再(길재, 1353~1419)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야은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약 400m 정도 떨어진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가까이서 담은 지주 중류 비각 전경]

 

砥柱(지주)란 중국의 河南城(허난성) 黃河(황허) 중류에 있는
砥柱山(지주산)을 가리키는데, 황허강이 범람할 때마다 탁류가 지주산에
부딪치지만 쓰러지지 않았기에 고려에 대한 충절을 굳게 지킨 길재를 이 산에 비유한 것이다.

역경 속에서 절의를 지키는 것을 지주 중류라 한 것인데,
중국 백이 숙제의 사당에 새겨진 비문이다.

 

[砥柱中流碑閣(지주 중류 비각)]

 

원래의 비석은 홍수로 매몰되고 지금의 비석은 정조(正祖) 4년(1789)
양의 해석을 운반해 와서 다시 세운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하기도 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비문이 닳아서 읽을 수 없게 되자 정조 4년(1780)에 다시 세웠다.
는 설도 전해 내려온다.

 

[砥柱中流碑(지주 중류비) 앞면]

 

寒岡(한강) 鄭逑(정구) 선생이 중국에서 탁본해 온 중국의 명필
楊晴川(양청천)의 글씨인 '砥柱中流(지주 중류)' 4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옆에서 담은 지주 중류비와 비각 천정]

 

비석의 재질은 사암이며, 개석 없이 윗부분이
평평하고 모서리에 각이 있는 直首(직수) 형태이다.
비신은 높이 320㎝, 너비는 109㎝, 두께 37.5㎝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머릿돌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砥柱中流碑(지주 중류비) 뒤면]

 

예조판서 柳成龍(류성룡)이 '지주 중류'의 뜻과 그것이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을 적은 '冶隱先生砥柱碑陰記(야은 선생 지주 비음기)' 음각되어 있다.

 

[砥柱中流碑閣(지주 중류 비각) 현판 중암 김오종 2006년 書(서)]

[砥柱中流碑閣(지주 중류 비각)]

 

전하는 말에는 이곳에 千斤(천근) 비석을 세우면 용이 움직여 후에
큰 인물이 날 것이다 하여 천근 비석을 세우니 이상하게도 비석이 두 동강이
났으므로 다시 萬斤(만근)이나 되는 비석을 세웠더니 이번에는 검붉은 피가
용솟음쳐 3일 동안이나 낙동강이 핏물로 변하여 흘렀다고 한다.
이 비석이 바로 砥柱中流碑(지주 중류비)이라 하기도 합니다.

 

[앞쪽 나무 태그 계단]

 

마을 쪽에서 들어오는 길과 비 앞쪽 도로에서 올라올 수 있게
나무 테크로 계단을 만들어 쉽게 들러볼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앞쪽 나무 태그 계단에서 담은 지주 중류 비각 전경]

 

류운룡은 당시 인동 현감으로 있으면서 지방 유림들과 뜻을 모아 지주 중류비는 물론
그보다 2년 앞서 길재의 묘 아래에 길재의 충절과 학행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추진,
3년여의 공사 끝에 吳山書院(오산 서원)을 세웠다.

 

[지주 중류비 앞에서 담은 안산 전경]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기관 역할을 했으나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지주 중류 비각 쪽에서 담은 마을쪽 전경]

 

청풍재는 오산 서원을 건립할 때 함께 세워진
길재의 墓齋(묘재)로 서원은 없어졌지만, 청풍재는 보존돼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