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원각과 高孟英(고맹영) 묘소

2018. 6. 20. 06:05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광주광역시 대촌동

 

[고씨 삼강문 옆  문중 제각 追遠閣(추원각) 전경]

[承訓門(승훈문) 현판]

[承訓門(승훈문)]

 

제봉의 뜻을 후손들이 길이 이어가라는 뜻인듯....

 

[좌측 옆쪽에서 담은 追遠閣(추원각) 전경]

 

추원각의 정문인 승훈문은 닫혀 있었지만,
다행히 옆으로 돌아 오니, 담과 담 사이를 넗게 뚫어놓아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두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담아왔습니다.

 

[입구쪽에서 담은 追遠閣(추원각)과 承訓門(승훈문) 전경]

[追遠閣(추원각) 현판]

[追遠閣(추원각)]

[世篤忠貞(세독충정) 편액]

 

世篤忠貞(세독충정)이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항상 나라에 충성하고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는 뜻으로 제봉의 좌우명이었다 한다.

 

[추원제 협문]

 

추원제 협문을 지나면 곧장 고씨 삼강문쪽으로 이어진다.
협문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 지붕이 바로 고씨 삼강문이 자리하고 있으며
고씨 삼강문과 추원재 뒤쪽 고원희 가옥 옆 낮은 둔덕에는 고맹영의 묘가 있다.

고경명 장군이 고운의 아들이자 부친인 고맹영의 묘를
현재 삼강문이 있는 쪽으로 모시면서 집터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잡았다.

고씨 삼강문은 소개를 해 드렸으니,
오늘은 고맹영의 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묘 뒤쪽에서 담은 고맹영 부부 묘 전경]

 

묘소를 오르기위해 추원각에서 다시 고원희 가옥쪽으로
고원희 가옥 옆 앝은 둔덕으로 조금 오르면 고맹영 부부 묘가 보인다.

 

[묘 뒤에서 담은 고맹영 부부 묘 전경]

 

장흥백 9세손 의정공 휘 맹영, 배 증 정부인 남평서씨 묘.
고맹영 선조의 바로 뒤편에 정부인의 묘소가 일렬로 있다.

 

[정면에서 담은 고맹영 부부 묘 전경]

 

본관 長興(장흥). 자 英之(영지), 호 霞川(하천).
高尙志(고상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증 공조참의 高自儉(고자검),
아버지는 형조좌랑 高雲(고운)이며, 어머니는 李好善(이호선)의 딸이다.

 

[정면에서 담은 고맹영 부부 묘 ]

 

중종 35년(15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명종 1년(1546) 예조좌랑이 되었다.

다음해 사헌부감찰이 된 뒤, 1550년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을 거쳐
다음해 特旨(특지)로 옥천군수가 되었다.

1553년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상석과 묘비와 묘]

 

1558년 兩司(양사)의 장령. 헌납. 집의. 사간을 거쳐,
1560년 世子侍講院輔德(세자시강원보덕)으로 加資(가자 : 관직이나 품계가 오름)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묘비와 묘]

 

李樑(이량)의 당여(黨與 : 정치적인 식견을 같이함)로서
항상 측근에 있고 싶어하였다.

이량이 평안감사에서 내직으로 들어오자,
자신도 병을 핑계로 내직으로 들어왔다.

 

[묘앞쪽에서 담은 전경]


1562년 첨지중추부사. 동부승지. 대사간. 홍문관부제학.
병조참의. 이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묘쪽에서 담은 아랫쪽 고씨삼강문과 추원각 전경]

 

이듬해 양사에서 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이량의 실각과 함께 유배당하였다.

부인 南平徐氏(남평서씨)는 徐傑(서걸)의 딸이다.
슬하에 1남을 두었는데, 아들은 의병장 高敬命(고경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