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감동 시킨 효자 모암 김덕숭

2018. 4. 24. 06:03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신도비와 뒤쪽 묘소 가는 길 전경]

 

모암 김덕숭 묘소 가는 길 앞쪽에 세워진 신도비 전경

 

[신도비와 앞쪽 塊石(괴석) 전경]

 

신도비 앞쪽 범상찮아 보이는 거북처럼 생긴 塊石(괴석)
일부러 다듬고 깎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긴 신비로운 바위인듯 하다.

 

[묘소 오르는 길]

 

묘소로 오르는 길은 이렇게 좀 가팔랐지만,
들려봐야겠다는 마음이 걸음을 빨리하게 하네요.

 

[중턱을 올라서자 보이는 첫번째 묘]

 

이젠 다 왔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누구의 묘인지는 몰라도 문인석과 오래된 묘비가
이곳의 주인도 범상찮아 보였지만...

답사지로 정한 뒤쪽 慕庵(모암) 金德崇(김덕숭) 묘소로 향했다.

 

[모암 김덕숭 묘소 오르는 돌계단과 묘소 전경]

 

공민왕 22년(1371)∼세종 30(144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江陵)(강릉. 자 子修(자수), 호 慕庵(모암).

松都(송도)에서 출생한 그는 判尹(판윤) 金天益(김천익)의 아들로,
牧隱(목은) 李穡(이색)과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할 때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글이
나오면 몇 번이든지 되풀이하여 읽었으며, 특히 효경을 좋아하였다.

 

[慕庵(모암) 金德崇(김덕숭) 묘]

 

공양왕 4년(1392) 고려가 멸망하자, 아버지 김천익은
松都判尹(송도판윤)의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栢谷面(백곡면) 石峴里(석현리) 楸子(추자) 마을로 낙향하였다.

 

[우측에서 담은 모암 김덕숭 묘소 전경]

 

김덕숭은 21세에 추천되어 進善(진선)에 제수되었고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을 비롯하여 司憲府執義(사헌부집의),
溫陽郡守(온양군수)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세종 8년(1426)
韓山郡守(한산군수)에 제수되었지만 부모 봉양하는 일이 오랫동안 소홀해짐을
염려하여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부모 봉양에 힘썼다.

 

[좌측 문인석]

 

평소 아버지는 꿩고기를 어머니는 물고기를 좋아 하셨는데,
한 겨울 몸져누우신 어머니로부터 잉어가 먹고 싶다는 말씀을 듣고
엄동설한에 잉어를 구하기 위해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며칠을 기도하니
무릎이 닿았던 자리가 녹아 그 구멍으로 잉어 두 마리가 튀어 올랐다 한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놓아주고, 한 마리만 가져와
모친이 먹게 하였더니 병환이 씻은 듯이 낳았다 한다.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하늘도 도왔다는 이야기이다.

 

[우측 문인석]

 

그의 나이 62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조석으로 부친께 드리는 문안인사에 소홀함이 없었다.

여묘를 살던 첫날밤에 범 두 마리가 와서 여막의 좌우에 앉아 지켜 주었는데,
낮에는 다른 곳으로 가고, 밤에는 와서 여막의 근방을 두루 살피었다.

 

[우측 구 묘비]

 

3년상이 끝난 뒤에 가 버렸다고 한다.
동물까지도 공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다.

 

[좌측 구 묘비]

 

1436년 병진에 3년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부터 아버지 옆을 조금도 떠나지 아니하고 봉양에 정성을 다 하였다.

 

[좌측에서 담은 모암 김덕숭 묘소 전경]

 

1437년에 장모 정씨를 모시고 왔는데 친어머니를 봉양한듯 하였다.
군내 유림들이 모두 감탄하였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세종 26년 1444년 72세때에 아버지는 95세였다.

 

[우측에서 담은 모암 김덕숭 묘소 전경]

 

세종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지금의 椒井(초정)에 거둥했을 때
그의 효행을 전해 듣고 酒肉(주육)과 백미 10가마를 하사하였다.

같은 해 7월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어머니 산소에 합장한 뒤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74세에 3년간 여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랫쪽에서 담은 모암 김덕숭 묘 전경]

 

세종 30년(1448) 노환으로 세상을 뜨자, 吏曹參議(이조참의)를 증직
천하대효라 칭송하고 御製詩(어제시) 3수를 내리어 亭閣(정각)을 건립하게
하였으며, 三綱行實圖(삼강행실도)에 그의 효행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旌閭(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효자 김덕숭 신 묘비]

[신 묘비 뒤면에 새긴 세종대왕 어제시]

 

'부모 봉야에 마음을 두었기에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에 평생을 바치었도다.
어머니 산소 옆에서 여묘를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전을 드리고 나면 아버지께 와서 문안을 드리었도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로다.' 하였다.

또 한 수의 글뜻은

'아버지를 땅속에 장사 지냈으미 어떻게 집에 와서 있을 수가 있으리오.
70세가 넘어서 아버지 상을 당하였지마는 3년간 여묘를 살았도다.
평생을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니 묘소앞에 세운 비 정려문은 빛나기도 하여라.'
라고 하였다.

 

[신 묘비 옆에 새긴 글]

 

대왕까지도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마지 않는 글이다.
이렇게 시를 지어서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였고,
특히 증직으로 이조참의를 내리었다.

이 사실을 중국 천자에게 글을 내었더니 천하대효라고 하여 유서를 내리었다.

 

[묘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세종 31년(1449) 6월에는 그의 두 아들
金貴識(김귀식)과 金貴試(김귀시)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후 仁祖(인조) 11년(1631)에 효자문을 세우게 되었다.

 

[묘에서 내려오며 담은 압구쪽 신도비 전경]

 

金德崇孝子門(김덕숭 효자문)은 충북 기념물
제143호로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후에 申磼(신잡)이 百行之源(백행지원)
기리는 백원서원을 세우고 김덕숭을 배향하였다.

백원서원은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백원서원이었음을 알리는 유적지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