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9. 06:01ㆍ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신도비 쪽 도로에서 담은 경주이씨 묘역 전경]
이시발의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지전마을의 경주이씨 묘역에 있다.
1610년 3월 이시발은 돌아가신 부친의 묘소를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 벌영산에서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로 직접 이장하고,
그해 4월에 진천 초평으로 살 집을 마련하여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며칠전 소개한 이시발 신도비를 보시지 못한
이웃님이 계신다면, 요기 클릭 하셔서 들려보셔요.^^
[아래쪽에서 담은 묘역 전경]
이곳 묘지는 明(명) 나라의 杜師忠(두사충)이 자리 잡아준 터라 한다.
이곳으로 산소를 정한 까닭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이 방방곡곡에 전승하며 한양으로 밀려오자, 선조는 義州(의주)로 파천하고
끝내는 명나라에 청병하였다.
이때 李如松(이여송)이 6만 대 군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원병 왔는데,
당시 명나라에서는 戰爭(전쟁)을 할 때 반드시 地師(지사)를 데리고 와서
지리(산천의 형국을 오행에 부치어 길흉을 살피는 것)를 살피게 한 연후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한다.
이때 따라온 지사가 杜師忠(두사충)이다.
이여송 장군이 여기서 陳(진)을 치면 어떠냐고 杜地師(두지사)에게 물었다.
두지사는 무방하겠다 하여 그곳에 진을쳤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하여 명군이 폐하고 말았다.
이여송 장군은 두지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폐전하게 되었다고
斬首形(참수형)을 집행 하려고 할때 이 소식을 들은 벽오공은 이장군에게
달려가서 여러모로 설득시켜 두지사의 사형 집행을 중지 하였다 하며,
벽오공의 恩惠(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이 터를 잡아 주었다 한다.
그 후 이름난 정승, 판서들이 줄줄이 배출 되었다 합니다.
[이시발의 손자 李寅煥(이인환) 墓(묘) 전경]
묘역의 맨 앞쪽에는 碧梧公(벽오공)의 손자의 묘라 합니다.
손자의 묘 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시발의 손자 李寅煥(이인환) 墓(묘)와 묘갈]
[이시발의 손자 李寅煥(이인환) 墓表(묘표)]
朝鮮國嘉義大夫行吏曺叅判生谷李公寅煥之墓
(조선국 가의대부 행사 조참판 생곡 이공 인환 지묘)
贈貞夫人完山李氏(증 정부인 완산 이씨)
贈貞夫人淸州韓氏(증 정부인 청주 한씨) 祔左(부좌)라 새겨져 있다.
祔左(부좌) : 남편과 아내를 합장할 때, 아내를 남편의 왼편에 묻음
[손자의 묘 뒤쪽 碧梧(벽오) 李時發(이시발) 墓(묘) 전경]
벽오공의 묘소도 1626년 별세하셨을 당시에는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의 선영 아래,장례를 치렀으나
1658년 아들분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이장했다.
따라서 이곳 산소의 석물은 1658년(효종9)에 조성된것인데
몇년전 동자석등을 야간에 도난 당해, 지금 보이는 문인석은
5년전에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돈이 되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훔쳐 간다는
도둑의 심뽀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정면에서 담은 碧梧(벽오) 李時發(이시발) 墓(묘)]
1569년 성균진사 오촌공(梧村公 ) 대건(大建)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의 휘 時發(시발), 호 碧梧(벽오), 後潁漁隱(후영어은), 자 養久(양구). 시호 忠翼(충익),
선조 22년(1589) 增廣試(증광시) 丙科(병과) 8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발발로 接伴官(접반관)이 되어 경주에서 명나라 장군 駱尙志(낙상지)를 접대하였고
都體察使(도체찰사) 柳成龍(유성룡)의 종사관으로도 활동하였다.
[벽오 이시발 墓表(묘표)]
定憲大夫刑曹參判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李公時發之墓
(정헌대부형조참판 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이공시발지묘)
贈 貞敬夫人驪興民氏祔左(증 정경부인 여흥민씨 부좌)라 새겨져 있다.
공은 이후 다시 영의정으로 추정되셨다.
문집으로 '碧梧遺稿(벽오유고)'가 있으며, 군사 관계 저술인 '籌邊錄(주변록)'이 있다.
[이시발의 묘 뒤쪽 父(부) 李大建(이대건) 墓(묘) 전경]
[이시발의 父(부) 李大建(이대건) 墓(묘)]
[이시발의 父(부) 李大建(이대건) 墓表(묘표)]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成均進士慶州李大建墓(성균진사 경주 이대건 묘)
貞敬夫人安東金氏祔左(정경부인 안동 김씨 부좌)라 새겨져 있다.
이 묘표는 효종 9년(1658) 손자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李大建(이대건) 이시발의 父(부) 墓(묘)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이시발 묘역 쪽에서 담은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소 전경]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발의 처 고령 신씨의 묘
조선 후기 문신인 이시발의 부인 고령신씨 묘로 이시발의 묘소 건너편에 위치한다.
고령신씨(1590~1661)는 승지 申應榘(신응구)의 딸로 이시발과
결혼하여 전처 驪興閔氏(여흥민씨) 소생의 자녀들과 함께 자녀들을 키웠다.
슬하에는 조선 현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한 이경휘와 좌의정 이경억이 있으며,
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발의 처 고령신씨의 묘소 전경]
원형 봉분으로 묘표와 상석을 갖추고, 좌우로 동자석과 망주석을 세웠다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는 이대건. 이시발 묘역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소 전면에 묘표석, 동자석 및 촛대석이 각각 1기씩 자리하고 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발의 처 고령신씨의 묘]
벽오공의 系配(계배)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이다.
벽오공의 좌편 卯坐(묘좌)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고령신씨 묘갈]
貞敬夫人高靈申氏之墓(정경부인 고령 신씨 지묘)
라 새겨져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썼다.
[묘 앞 우측 동자석 망두석]
[묘 앞 좌측 동자석 망두석]
[묘 좌측에서 담은 조선후기 문신 이시발의 처 고령신씨 묘 전경]
[묘 뒤에서 담은 안산 과 우측 옆으로 보이는 경주이씨 묘역 전경]
조선 중기의 문신 李時發(이시발)의 부인 고령신씨는
이시발과 혼인하여 전처 소생의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성장시켜
가문을 일으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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