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효)와 節義(절의)의 상징 瞻栢堂(첨백당)

2018. 5. 10. 05:57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 979

대구문화재자료 제13호

 

[광복소나무와 첨백당 전경]

 

宣祖(선조, 25) 1592년 임진왜란 때 丹陽人(단양인)  禹翊臣(우익신)
有義(유의)가  난을 피해 경기도 驪州(여주)에서 남하하여 八公山(팔공산)
남쪽 龍岩山(용암산) 계곡 내의 작은 평지에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이 坪廣洞(평광
丹陽(단양) 禹氏(우씨)의 世居地(세거지)가 되었다.

 

광복소나무에 대해 알아보시려면 요기 클릭 하셔요.^^

 

[좌측에서 담은 첨백당 전경]

 

대구 평광동에 자리한 첨백당은 고종 3년(1896) 丹陽 禹氏(단양 우씨)의
재실로 지어졌는데, 단양 우씨 후손 중에서 효성이 지극했던 禹孝重(우효중)과,
조선시대 말기 때 節義(절의)를 지켰던 선비 禹命植(우명식)을 기리고 있다.

 

[안내판과 첨백당 표석비]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瞻栢堂(첨백당) 표석비]

[첨백당 오르는 돌계단]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斷指(단지)하여
그 피로 回生(회생) 하게도 하였으며, 돌아가신 뒤로도 3侍墓(시묘)
孝行(효행)으로 벼슬이 朝奉大夫重蒙敎官 同知中(조봉대부중몽교관 동지중)
樞府事(추부사)에 증직되었던, 禹孝重(우효중)과 한말의 국운의 기움을 슬퍼하며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산 禹命植(우명식)의 절개를 기리며 아울러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高宗(고종, 33) 1896년에 세운것으로 1924년에 重修(중수) 하였다.

 

[瞻栢堂(첨백당) 현판]

[瞻栢堂(첨백당) 전경]

 

堂號(당호)는 禹命植(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잣밭골(栢田谷, 백전곡)들 우러러 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첨백당이라 하였으며 150평의 안마당에 건물은 5樑(량)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박공면에 내림지붕이 붙어 있다.

 

[좌측에서 담은 첨백당 전경]

 

대청은 우물井자형이고 양쪽 툇마루는
대청보다 1자가량 높으며 난간이 아담하게 둘러져 있다.

 

[瞻栢軒(첨백헌) 현판]

[첨백당 좌측 내부 전경]

[첨백당 우측 내부 전경]

[敬止齋(경지재) 현판]

 

敬止(경지)의 뜻은

윗사람을 공경함.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받들어 모시다
끝없이 노력하면 날마다 달마다 발전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우측에서 담은 첨백당 전경]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人(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집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있는데 양쪽 툇마루보다 높게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아담하게 둘러 놓았다.

1924년에 건물의 손상된 부분을 새롭게 고쳤다고 한다.

 

[첨백당 앞뜰의 정원수와 바같 은행나무 전경]

[嘉善大夫禹公命植事蹟碑(가선대부우공명식사적비)]

[嘉善大夫禹公命植事蹟碑(가선대부우공명식사적비) 전경]

 

광복소나무와 1896년 재실을 지을 때 함께 심었다는 은행나무 근래에 세운 
가선대부우공명식사적비(嘉善大夫禹公命植事蹟碑)가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