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皐書院(임고서원)

2018. 1. 8. 05:59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임고서원 주차장]

 

넓은 주차장에는 안내 팻말도 세워져 있다.
어디부터 들릴 것인지 안내 팻말을 본 후 마음으로 정해놓고
들러보시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계현재와 임고서원 외삼문 영광루 전경]

 

전 서원부터 들리기로...
두어 번 들린 곳이기에 오늘은 서원만 들러보기로 하였다.

 

[임고서원 영광류 전경]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圃隱(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明宗(명종) 8년(1533) 浮來山(부래산)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位田(위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永光樓(영광루) 현판]

 

[永光樓(영광루) 전경]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移建(이건) 하여 再賜額(재사액) 받았다.

 

[영광루 아래쪽 景仰門(경앙문)]

 

서원의 큰 행사가 있으면 이 문이 활짝 열리지만,
평소에는 경앙문 옆 작은 출입문으로 서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臨皐書院(임고서원) 현판]

[臨皐書院(임고서원) 전경]

 

인조 21년(1643) 旅軒(여헌) 張顯光(장현광)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 芝峰(지봉) 皇甫仁(황보인)을 추배하였으며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
尊影閣(존영각)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서원 내부 강당]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 사업을 마쳤다

2001년 芝峰(지봉) 皇甫仁(황보인) 선생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 文忠祠(문충사), 내삼문 由正門(유정문), 강당 興文堂(흥문당),
동협 敬義夾(경의협), 서협 明誠夾(명성협), 동재 修省齋(수성재),
서재 涵育齋함육재), 문루 永光樓(영광루), 경내 尋眞閣(심진각)과 典祀廳(전사청)
포은 선생 神道碑(신도비) 丹心歌碑(단심가비), 白鷺歌碑(백로가비) 등이 있다.

 

[내삼문 전경]

 

고려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迎日(영일).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 夢蘭(몽란) 또는 夢龍(몽룡),
자는 達可(달가), 호는 圃隱(포은).

어머니 李氏(이씨)가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몽주라 고쳤다.

 

[내삼문 由正門(유정문)]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후진을 육성하고 학통을 계승 시킨 고려의 세 忠臣(충신),
牧隱(목은) 이색, 圃隱(포은) 정몽주, 冶隱(야은) 길재
이들의 호가 모두 隱(은) 자가 들어 있어 흔히 '三隱(삼은)'이라 부른다.

三隱(삼은) 중 한 분이신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修省齋(수성재) 현판]

[동재 修省齋(수성재) 전경]

[涵育齋함육재) 현판]

[서재 涵育齋(함육재)와 신도비각 전경]

[정면에서 담은 신도비 전경]

[신도비 옆 전경]

[안쪽에서 담은 永光樓(영광루) 전경]

 

이곳에 임고서원이 들어서게 된 것은
포은 선생의 부모 묘가 서원 뒤편 부래산에 있기 때문이다.

부래산 기슭에는 포은 선생의 부 일성부원군
云瓘(운관) 묘와 어머니 변한국부인 영천 이씨 묘가 함께 있다.

그리고 서원 바로 옆에 묘소를 지키는 啓賢齋(계현재)가 있다.

 

[통정대부 공조참의 최선매 공적비와 안내석 전경]

 

구서원과 신서원 사이에 있는 통정대부 공조참의 최선매 공적비

 

[설명 글 내용]

[구 임고서원 전경]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이방원의 '何如歌(하여가)' 답해 지은 시조 '丹心歌(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되었다.

 

[구 서원쪽에서 담은 임고서원 전경]

 

이방원의 何如歌(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고 유혹했으나 정몽주는 丹心歌(단심가)로 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포은 유물관과 조옹대 전경]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정몽주는 시종에게 말을 가져오라 하고는 말에 거꾸로 올라탔다.

"대감마님, 말을 거꾸로 타셨습니다."
시종은 정몽주가 술에 취해 실수를 한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다.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기가 얼굴을 덮칠 것이 끔찍해 말을 거꾸로 탔느니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정몽주는 결국 조영규가
휘두른 쇠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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