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6. 06:00ㆍ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
[1지역 안내판과 신도안 도성 전경]
[계룡산 신도내 주초석 및 석재 안내 글 내용]
[신도안 도성 추측도]
[신도안 도성 추측도 안내판 글 내용]
[1지역 신도안 도성 안내판 전경]
[천도 논의]
[신도 후보지 계룡산 순회]
[고유제 모습]
[신도안 도성 건축]
[신도안 도성 앞쪽 쉼터]
계룡산은 '鄭鑑錄(정감록)'에도 나와 있는 吉地(길지)로서
제일 먼저 천도 후보지에 올라 도성 축성을 일정 부분 진행하였다.
그러나 위치가 나라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圖讖思想(도참사상)에 의하면 계룡산 일대는 鄭氏(정씨)가 도읍을 세우는
곳이라는 주장 때문에 10개월 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한다.
[1지역 신도안 도성 주춧돌 전경]
그때 쌓은 기단 일부의 석축 물만 전해지고 있으며,
이런 연유로 이곳의 지명이 '새로운 도읍지'라는 뜻으로
新都案(신도안)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지금은 산 이름을 따서
계룡대라 고쳐 부르며 육. 해. 공군의 참모부가 들어섰다.
[1지역 신도안 도성 주춧돌 전경 2]
태조 이성계의 대궐 공사 흔적 곳곳에 남아있다.
[애니메이션으로 편집한 1지역 신도안 도성 주춧돌 전경]
[1지역 신도안 도성 주춧돌 전경 3]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 당나라 장수 薛仁貴(설인귀)가 계룡산을 보고서
"중국에 皇帝(황제)가 있는데 어찌해 계룡산을 '帝都(제도)'라고 하느냐,
당장 삭제하라"라고 명령하자, 帝字(제자)에서 양편 劃(획)을 떼어 辛字(신자)로 고쳐
'辛都(신도)'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설득력이 없다.
[1지역 신도안 도성 주춧돌 전경 4]
정감록에 나타난 것처럼 '鄭氏(정씨)'의 도읍지이지
'李氏(이씨)'의 新(신) 도읍지가 아니라 해서 '新都(신도)'안이라고 했다.
新都(신도)는 새 도읍지, 안은 부정의 뜻이기 때문이다.
[1지역 신도안 도성 주춧돌 전경 5]
이같이 '新都(신도)'안에 대해서는 많은 지명 표기가 있는데,
대부분 토착민들은 '신도내(新都內)'라고 불리기를 희망한다 하네요.
[1지역과 2지역 신도안 도성 전경]
수천 년 찬란한 계룡산 시대가 열리어
새로운 한국의 중심지가 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라 한다.
[신도안 도성]
잘 알려진 대로 신도안은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고 松都(송도)에서 遷都(천도) 하려고 한 곳이다.
[2지역 안내판과 신도안 도성 전경]
[2지역 안내판 글 내용]
[1지역과 2지역 신도안 도성 주춧돌 전경 6]
그 당시 대궐 공사 한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는데, 주로 柱礎石(주초석)과 立石(입석) 등이다.
[2지역 안내판과 신도안 주춧돌 전경]
대부분이 夫南(부남). 石溪(석계). 丁壯里(정장리)
일대에 분포되어 있던 것으로 약 120여개나 된다.
[2지역 신도안 도성 주춧돌 전경 7]
주초석은 주로 들 가운데나 나무 인근에 있었는데,
이런 주춧돌을 1983년 620사업으로 토착민이 철수하자
한 곳으로 모아 보존하고 있다.
[2지역 애니메이션으로 편집]
[충렬사 안내판 전경]
[충렬사 안내판 글 내용]
[佛宗佛朴(불종불박) 애니메이션 편집]
장래에 불법이 주교가 되고 그때의 부처님은 박씨임을 암시하는
佛宗佛朴(불종불박)이란 글을 바위에 무학대사가 새겼다 하네요.
[佛宗佛朴(불종불박)이 새겨진 바위}
[좀 더 크게 담았습니다. 찾아보셔요.]
현장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는데, 사진으로 담았으니
찾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쓰인 것 같은 글자 모양은 보이겠죠.
[2지역에서 담은 1지역 도성 주춧돌 전경]
그러나 일부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거나 팔기도 해 제대로 관리를 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1지역 도성 주춧돌]
계룡대에 보관된 주춧돌은 어쩌면 대궐의 토대로 쓰일 뻔했으나
河崙(하륜) 때문에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다.
벌써 600여 년이 지났으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다.
[1지역 뒤쪽 2지역 앞쪽 안내판 전경]
[신도내주초석 조감도]
[신도내 주초석 석재]
주춧돌은 신도안 內(내)의 부남리를 비롯한 정장리.
석계리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 부남리에 모아 놓았다.
석재의 크기는 대개 직경 1.2mx1.8m의 것으로 궁궐 건축용 주춧돌로 판단된다.
신도안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서는 태조가 즉위하여 계룡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기초공사까지 하다가 물길이 멀어서 중지하고 말았는데,
그 뒤 그곳을 신도라고 불렀으며, 아직도 군데군데 주춧돌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뒤쪽에서 담은 1지역 신도안 주춧돌 전경]
정감록의 예언대로 계룡산 시대가 온다면 이 주춧돌은 빛 볼 날이 있을 것이요,
그때는 과거에 하지 못했던 대궐 터로 쓰일 수 있으리라. 신도건설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전설은 지금도 전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신털이봉' 전설이다.
[1지역 2지역쪽 안내판 신도안 주춧돌 전경]
두마면 신도안에는 도읍지로 알려진 대궐 터가 있다.
이태조가 천도 준비로 일 년여 역사를 할 때에 수많은 역군들이
일을 하고 쉬면서 신의 흙을 털어 모은 것이 '신털이봉'이 되었다.
[뒤쪽에서 담은 1지역 안내판과 주춧돌 전경]
또 다른 전설로는 계룡산 산신할머니가 계룡산의 흙을 한 줌도
가져가지 말라는 분부에 짚신에 묻은 흙까지 털었더니 봉우리가
되었다는 신털이봉이라 하기도 한다.
[신도안 입구쪽 전경]
이 외에도 斗實里(두실리)이는 논과 밭에서 나오는 소출이 많아
곡식이 가득한 마을이었고, 원부남은 佛庵寺(불암사)가 있던 자연마을이며,
개판이(東垈里) 노적봉 동쪽에 있었던 마을이고 露積峯(노적봉)은 계룡대
옥타곤 뒷산으로 멀리서 보면 잘 익은 벼를 쌓아놓은 형상처럼 보여 노적봉이라
불렀으며, 현재 KBS 중계소의 케이블카 시설이 있는 백암동은 흰 바위가 멍석처럼
깔려 있었다고 하며, 배암골은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던 곳이고,
숫용추는 이곳에 살던 숫용이 승천한 장소라고 전해진다.
[육군 기념품 판매소 전경]
[신도안 출입구 쪽 벚꽃]
대궐 공사 흔적인 신도내 주초석 115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가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에서다.
신도안 도성 소개를 마칩니다.
'문화산책 > 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구 중인 진천 농다리 (0) | 2018.04.30 |
---|---|
李時發神道碑(이시발 신도비) (0) | 2018.04.28 |
대구 달성공원 앞(순종황제남순행로) (0) | 2018.04.12 |
수창공원 내 흔적 기둥 (0) | 2018.04.11 |
옥산동 7호 토기가마 (0) | 2018.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