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8. 05:49ㆍ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6-11
충북 유형문화재 제142호
[李時發神道碑(이시발 신도비)와 雙梧碑閣(쌍오비각) 전경]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시발(1569∼1626)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안내판 글 내용]
[雙梧碑閣(쌍오비각) 현판]
[李時發神道碑(이시발 신도비)와 雙梧碑閣(쌍오비각)]
본관 慶州(경주). 자 養久(양구), 호 碧梧(벽오)이다.
선조 2년(1569) 충청북도 오창면 오근리(지금의 장대리)에서
梧村(오촌) 李大建(이대건)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자의 호에 똑같이 梧(오) 자가 들어 있는 것은
그들이 살던 梧根里(와 근리)와의 연고 때문이라 한다.
[神道碑(신도비)와 雙梧碑閣(쌍오비각]
선조 22년(1589)에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朴春茂(박춘무)와 함께 활약하며 많은 공을
세웠으며, 선조 29년(1596) 10월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군사시설의 설치와 군량의 확보 등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掌樂院政(장락원정). 刑曹判書(형조판서)를 지냈고,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北邊(북변)을 방어하기 위하여 포대와 성곽을 보수하였다.
[李時發神道碑(이시발 신도비)]
李适(이괄)의 난 때는 體察副使(체찰부사)로서 공을 세웠고,
남한산성의 役事(역사)를 감독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이에 사후 領議政(영의정)에 추증되었고 忠翼(충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좌측 神道碑(신도비) 螭首(이수)]
[좌측 神道碑(신도비)]
이 신도비는 선조. 광해군. 인조의 3대에 걸쳐 왕을 잘 섬기면서
女眞人(여진인)을 무마하여 백성의 생활에 안정을 주고 地方民(지방민)을
평온하게 하였던 功(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효종 9년(1658)에 건립된 이 비의 비문은 宋時烈(송시열)이 지었으며,
書(서)는 宋浚吉(송준길)이, 篆(전)은 李正英(이정영)이 맡았다.
[우측 神道碑(신도비) 螭首(이수)]
[우측 神道碑(신도비)]
비의 형태는 네모꼴로 받침돌 위에 글을 새긴 비 몸을 세우고
비 머리를 얹은 형태로, 비의 머리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을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이시발이 죽은 후 그의 부친의 墓(묘)를 초평면 용정리로 이장하였는데,
자손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그 일족에게 草坪李氏(초평 이 씨)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신도 비각 주변 무더기로 핀 꽃마리]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풀이려니 무심코 스치고
지나치게 되는 봄꽃 꽃마리 작은 꽃이지만, 꽃은 꽃이기에
담아 갤러리에 따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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