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터에 세운 石齋(석재) 徐丙五(서병오) 胸像(흉상)]

2017. 1. 16. 06:12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3가

 

[근대로의 여행(진골목)]

 

진골목 벽화를 보기 위해 들어선 골목에서 만난
石齋(석재) 徐丙五(서병오) 書畫家(서화가) 선생의 胸像(흉상)

 

 

대구 근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석재 서병오 이곳이 그가 태어난 생가 터라 한다.

 

[石齋(석재) 徐丙五(서병오) 胸像(흉상)]


본관 達城(달성). 호 石齋(석재). 영남출신으로 일찍이 군수를 지냈다.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上海(상해)로 가서 그때 그곳에
망명중이던 閔泳翊(민영익)과 친밀히 교유하면서 그의 소개로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중국인 서화가 蒲華(포화). 吳昌碩(오창석)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다.

 

[석재 서병오 선생의 연혁]

[자세히]

[선생의 작품]


1909년도 상해와 일본을 여행하였고,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특히 포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그의 문인화법의
영향을 받은 文氣(문기) 짙은 墨竹(묵죽) 등 사군자를 그리게 되었다.


글씨는 매우 격조 있는 行書(행서)를 남겼다.

 

[자세히]

[석재 소개 글 내용]


글씨는 行書(행서), 그림은 梅(매). 竹(죽). 松(송). 菊(국) 등
四君子(사군자)에 뛰어났다.


시. 글씨. 그림. 가야금. 장기. 바둑. 의약에 능하여 八能(8능) 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중국. 일본에 갔을 때는 그곳  명사들과  文墨(문묵)의 교류가 있었다한다.


대구에서 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후진양성에 힘쓰고,
朝鮮美術展覽會(조선미술전람회) 書道部(서도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옛말에 좋은 집터를 얻으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좋은 터는 큰 복을 가져다주지만, 쉽게 얻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10만석꾼이라 불렀던 서병오의 집터에 요즘 한창
대구를 대표하는 새로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다시 태어난다 합니다.
국내 최초 대구 최대 로드 상가 지하 1층 지상 5층의 애비뉴8번가가 분양중이다.


석재 서병오 선생 기념관도 상가안에 건립한다 합니다.
완공 된 후에 선생의 기념관에도 들려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