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6. 06:08ㆍ문화산책/고택과 문학관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100번지
[서상돈 고택 전경]
한때 (구)고려예식장 일대에 30층 주상복합아파트 신축사업으로
위기를 맞았던 서상돈 선생 고택은 아파트사업주인 (주)L&G측의 협조와
대구시, 고택보존운동본부의 노력으로 복원,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서상돈 고택은 상화 고택의 대문 앞 길 하나를 두고 높다란
아파트 밑에 위치해 있지만, 높낮이의 묘한 조화를 이루어고 있다.
[안내판 글 내용]
[출입구]
우측 안쪽으로 정식 대문이 있지만, 그곳은 닫혀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이곳으로 고택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서상돈 고택 안채 전경]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민족운동가셨다.
가톨릭교도로 신유박해, 기해박해 등의 고난으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여러 곳을 옮겨다닌 집안의 내력으로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하여 일을 하였다.
[사랑방]
1871년 대구에서 독학을 하며 紙物(지물) 행상과 포목상을 하여,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으며, 뒤에 경상도시찰관에 임명되었다.
[대청마루]
서상돈선생이 당시 대구 최고의
갑부였던 것을 감안하면 집은 매우 소박한것 같다.
[안방]
[부엌]
[부엌내부 전경]
[부엌 내부]
[고택 안에서 담은 대문]
[안채쪽에서 담은 안채와 사랑채]
1898년 獨立協會(독립협회)와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랑채 전경]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고이율의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사랑채 내부]
이러한 국운의 절박함에 드디어 1907년 1월 대구의
廣文社(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으로 계시던 서상돈 선생은
김광제 선생과 뜻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지 못하면 땅을 일본에 바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달만 끊고 그 돈을 모으면 빚을 갚을수 있을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으며, 스스로 800원 이라는 거금을 냈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채 내부 2]
금연운동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사랑채 내부 3]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사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국민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국채보상 취지 내용 요약 글]
[국채보상 운동 설명 글 내용]
[안채쪽에서 담은 관리실과 사랑채]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에 전념해 실업진흥을 통한 민족실력 양성에 애쓰다가
1913년 6월 30일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셨다.
정부는 두 사람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김광제 선생과
1999년 서상돈 선생에게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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