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德惠翁主(덕혜옹주)

2016. 8. 22. 06:13추천합니다/영화 감상

[덕혜옹주역 손예진]

덕혜옹주 그는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나
금지옥엽 귀한 신분이었지만,  고종의 딸이라는
이유로 일제와 조국에 의해 철처히 외면당한 삶을 살아야했다.


[고종역 백윤식]

고종은 철종 3년(1852) 흥선대원군 李昰應(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 熙(희), 아명 命福(명복),
초명 載晃(재황), 자 明夫(명부), 聖臨(성림)이다

철종이 1863년 12월 8일에 후사를 남기지 않고 돌아가시자
조대비(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1907년 7월,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다.
대한제국의 자주를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비운의 왕
고종의 퇴위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었다 한다.

德惠翁主(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福寧堂(복녕당) 귀인 梁春基(양춘기)의 소생으로, 고종황제의 고명딸이다.
고종황제가 60세일 때 얻은 늦둥이라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강제 유학길에 오른 옹주와 궁인들과의 이별 장면]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한 고종황제는
덕혜옹주가 8세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다.

김황진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자
"그럼 조카라도 달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황제가 세상을 뜬 후 약혼은 깨지고,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옹주의 생모 양귀인역 박주미]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는 덕혜옹주에게
생모인 양귀인이 보온병을 주며, 절대 이속에 든 물외에는 먹지 말라 하였다.

고종의 독살을 생각하며, 행여 덕혜옹주도 해를 입을까 염려함이었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며 그 누구도 믿지 못한 그녀가
보온병을 들고 다니며 그 안에 담긴 물만 마셨다는 일화도 있다.


[유모 복순역 라미란]

덕혜옹주의 강제유학길에 함께 동행한 유모 변복동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1930년, 어머니인 귀인 양 씨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로 인해 몽유병과 최초의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대마도의 번주 출신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혼인하게 된다.
결혼한 지 1년쯤 후인 1932년 8월 14일,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사에(正惠)라는 딸이 태어났다
출산 후 다시금 조현병 증세를 보였고 점차 부부 사이도 파탄이 난다.


[약혼자 장한역 박해일]

영화속에서는 김장한이 덕혜옹주를 귀국 시키지만,
실제로는 1962년에 되어서야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의
노력 덕에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독립군역의 안내상과 그 외 여러분] 

강제로 빼앗아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셨던 위대하신 선조님들을 존경합니다.

그분들 덕분으로 독립이 되었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되었다.


[영화속 귀국순서를 기다리는 옹주와 딸 마사코]

패망한 후 귀국하기 위해 딸과 함께 귀국선을 타기위해
차례를 기다렸지만, 귀국을 할 수 없게되자 실망한 덕혜옹주

옹주의 딸 마사에는 1956년 결혼을 하였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이때 현해탄(대한해협)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근거 없는 소문이라하며, 실종신고 후
7년이 지나도록 생존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처리되었다.


[덕혜옹주 출연진들]

1962년에 되어서야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의 노력 덕에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 밑에서
덕혜옹주를 돌보았던 유모 변복동 여사가 덕혜옹주를 맞이하였다.

변 여사는 옹주가 탄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연신 "아기씨"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직접 만났을 때는 덕혜옹주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돌아온 덕혜옹주는 주변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옛 기억이 살아났는지 궁 안을 돌아볼 때 연신 눈물을 흘렸다.

말년의 덕혜옹주가 정신이 맑아졌을 때 썼다는 글.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이구 씨가 보고 싶어요.'


이 글귀가 '한국사 傳(전)'
소설 '덕혜옹주'에서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1985년 前(전) 남편 다케유키가 사망했다.
4년 후인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도 78세를 일기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별세한다.

장례식은 4월 25일에 황실 가족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능역에 안장되었다.

 

'추천합니다 > 영화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봉오동 전투  (10) 2019.08.16
다큐멘터리 영화 순종  (0) 2016.11.28
명량  (0) 2016.06.30
팅커벨 4 날개의 비밀  (0) 2016.01.12
사랑과 영혼  (0) 2016.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