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川書堂(월천서당)

2016. 6. 8. 06:02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539
경상북도  기념물 제41호

 

[서당 입구쪽 노거수(느티나무)]

[노거수와 月川書堂(월천서당) 전경]

 

동부 2리에 속하는 月川里(월천리)는 우리말로
'달내'이므로 연음하여 '다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月川(월천) 趙穆(조목, 1524~1606)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당시 마을 이름이 月川(월천)이었다 합니다.


안동댐 건설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었으며,
현재 호수를 사이에 두고 예안면 부포 나루터와 마주보고 있다.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月川書堂(월천서당) 전경]

 

月川(월천) 趙穆(조목, 1524∼1606)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선생의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로 明宗(명종) 7년(1552)
生員試(생원시)에 합격하여 成均館(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여러 官職(관직)을 거쳐 工曹參判(공조참판)에 이르렀다.

 

[月川書堂(월천서당) 현판]

 

걸려 있는 월천서당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라 합니다.

 

[좌측에서 담은 月川書堂(월천서당)]

 

선생은 진작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45차례에 걸쳐 拜命(배명)이 내렸으나
대부분은 나가지 않아 40여년 동안 실재 봉직한 기간은 4년 남짓할 정도였다 합니다.


아버지가 예안에 사는 권수익의 따님에게 장가들면서
월천에 세거하게 되어 1524년 예안현 월천리에서 태어나셨으며,
월천이란 마을 이름에서 호를 월천으로 삼았다 합니다.

 

[우측에서 담은 月川書堂(월천서당)]

 

12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으며,
15세 되던 해에 퇴계 선생이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오셨을 때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이후로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년 동안 직접 도산을 찾아가거나 편지를 통해 공부하였다 합니다.

 

 

닫혀 있는듯한 서당의 문고리를 잡고 열어보니, 스르르 열린다.

 

[열린 서당 문 앞에서 담은 입구쪽 전경]

 

역동서원을 건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동문들을 모아 상덕사를 건립하였으며,
45차례 벼슬이 내렸졌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늘 스승 퇴계 선생을 따라 공부하였고,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뜻을
잇는 것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합니다.

 

[우측 서당 내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 단층 기와집인데,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칸방을 설치한 홑처마집이다.

 

[좌측 서당 내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동생 및 두 아들과 더불어 郭再祐(곽재우) 공과 함께
합세하여 국난 국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서당에서 담은 노거수(느티나무)]

[노거수와 월천서당 전경]

 

조선중기 서당구조와 형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며
현재의 건물은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형으로의 복원이 우선시 되었다.

 

묘소는 서당 뒷편 부용산 남쪽 언덕에
있으며, 월천서당과 50여 보 거리에 있다하는데,

이번 길에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며, 우리와는 인연이 닿지 않아서 일까? 

 

그대신 선생의 아우 趙禎(조정, 1551~1633)선생의

정자 謙齋(겸재)와 정자 뒤쪽에 있는 묘소에는 들려보고 온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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