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애환이 깃든 청령포

2016. 4. 18. 05:59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南面(남면) 廣川里(광천리)
강원도 기념물 제 5호

 

[왕방연시조비]


詩調碑(시조비)가 있는 자리는 1457년 10월 24일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행차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의 죽음을 보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다는 곳이다.


1617년 병조참의 용계 김지남이 영월 순시때
아이들이 이 시조를 노랫가락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한다.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1617년 김지남이 한시로 지어 정착시켰다한다.)

 

[청령포 노래비]

[노랫말]

[청령포 숲 전경]


선착장에서 청령포를 바라보고…
저 푸른 소나무숲이 바로 청령포 소나무숲으로
제 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천년에 숲’으로
선정되어 우수상을 수상한 숲이라한다.
(2004년 11월 11일 산림청, 생명의숲국민운도, 유한컴벌리)


삼면이 깊은 남한강 상류의 西江(서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유배되었던 端宗(단종)이
'陸地孤島(육지고도)'라고 표현하였다한다.

 

[철령포 숲]


계유정난의 후폭풍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조선 제6대 왕이었던 열일곱살
어린 단종의 애달픈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1457년(세조 3년) 6월
이곳으로 유배되었고 그 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침수되자
8월에 영월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긴 후 10월에 한 많던 이승을 떠났다.


배에서 내려 자갈밭을 지나 들어선 울창한 송림속에
단종의 유배거처와 시중들던 궁녀들의 초가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복원되어 있었다.

 

 

[시녀들이 살던 집]


궁녀들이 거처를 통해 단종의 거처를 둘러보며…
가슴속이 뭉클하며 울컥 무언가 치밀고 올라오는 비애를 느꼈다.

 

[시녀들이 거처하던 복원된 초가집]


시종들이 살던 초가집이 일자 모양으로 놓여있었으며,
모두 한평 남짓한 방으로 되어있었는데, 아주 비좁아 보였다.

 

 

 

다듬이질하고, 바느질하고, 또 밥하는 모형을 만들어 두었네요.

 

[단묘유지비각]


사후 240년만인 1698년(19대 숙종 24년)에 이르러서야
임금으로 복위된 단종의 유배 처소를 ‘어소’로써 확인하는
'端廟在本府時遺址碑(단묘재본부시유지비)'
1763년(21대 영조39년)에 비각과 함께 세워져서 내려온다.


단종의 어소는 홍수로 떠내려가서 다시 복원하였는데,
지금 복원되어 세워진 그 자리가 아니고…
현재 비각이 세워져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비각을 중심으로 돌로 경계선을 그은듯 이어져 있는
안쪽이 예전에 단종이 머물던 ‘어소’ 자리였다한다.

 

[안내판 글 내용]

[단묘재본부시유지]


비각 안의 碑(비)에는 '端廟在本府時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라 새겨져 있다.

 

[복원된 御家(어가)]


御家(어가)는 어가 또는 적소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
御家(어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2000년 4월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기와집으로 재현했다.

 

[御家(어가) 사랑채]

[단종을 모시는 사령의 모습]

[단종의 御製詩(어제시)]


어가 중앙 마루에 걸린 단종의 御製詩(어제시)

 

[어가 대청마루에 놓인 장]

[책읽는 단종]


밀랍인형으로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생명없는 인형의 모습을 보면서도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그때의 이불이야 아니겠지만, 단정히 개켜져 있는
이불과 단정한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는 단종의 밀납인형을
바라만 보아도,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온다.

 

[소나무와 御家(어가) 전경]


이곳 소나무들은 모두 하나 같이
어린 단종을 향해 읍소하는 모습으로 가지가
집안쪽을 향해 늘어져서 자라고 있었다.


한같 微物(미물)들도 이렇듯 정성을 다해 섬기건만…
하물며 사람으로서…어찌…

 

[觀音松(관음송, 천연기념물 제349호)]


관음이라 해서 불교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며,
단종이 이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 볼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音.
觀音松(관음송)이라 이름하였다한다.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2m의 크기이며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관음송 안내판 글 내용]

[망향정 오르는 계단]


청령포 / 草阿(초아) 박태선


애끓는 마음
울분의 통곡
님 계신 한양 천리


청령포 여울목
서강 따라
흐르지 못한 한이여


피눈물로 지새다
두견새 닮아버린
어린 넋이여

 

[망향탑]


열입곱살 단종은 배필이던 정순왕후 송씨를
생각하며 막돌을 주워 님을 그리는 돌탑을 쌓았다한다.
지금 보는 망향탑은 아무래도 후세 사람들이 쌓은 것 같다.


사실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랴,
어린 임금의 외롭고 슬픈 처지를 설화로 엮어낸
민초들의 애틋한 마음이 만들어 낸 탑이면 그 또한
단종의 마음과 무엇이 다르랴…


정순왕후 송씨는 궁궐에서 ?겨난 뒤 동대문 밖
지금의 숭인동 산기슭에 삼칸 초가(정업원)를 짓고
매일 조석으로 인근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무사를
기원했고 단종의 죽음을 알고는 평생을 매일 조석으로 통곡하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는 처음엔 따라나온 시녀의 동냥으로,
그 이후론 인근 아낙네들의 적선으로, 나중에는 염색들이는
일을 하여 근근히 연명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세조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무치는 원한을 가슴속 깊이 묻고 한 많은 인생을 그렇게 82세까지 살았다.
그 피맺힌 한은 어떠했을런지…

 

[망향대에서 바라본 전경]


망향대에서 내려다 본 서강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밑을 흘러가고 있었다.
빤히 바라보고도 나갈 수 없는 바깥세상…한양 길


권력이란 무엇인가?
어린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해야 했던 왕의 자리


죽이고 싶지 않아도 죽여야 하는 상황으로 몰려 가는 것,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으로 몰리는 절대권력의 자리.
과연 세조는 후회가 없었을까?

 

[노산대]


단종이 한양 쪽을 바라다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울퉁불퉁한 바위인데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절벽 밑으로 무심한 서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그 옛날의 서강은 단종의 눈물과 한을 싣고 몽매에도 그리던 한양으로 흘러갔을까?

 

[정면에서 담은 청령포 禁標碑(금표비)]


비록 늦었지만, 임금이 거처했던 성역이라
백성의 출입을 통제하는 금표를 1726년(영조2년)에 세웠다.

 

[뒤쪽에서 담은 청령포 禁標碑(금표비)]


정면엔 '청령포금표', 후면엔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새겨져 있다.


요즘말로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인가자 외 출입금지' 푯말이다.

 

[금표비 안내판 글 내용]

[철령포에서 담은 건너편 전경]


요샛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귀하고 귀하신 몸이셨지만, 참으로 한 많은 삶을 살다가신 단종


차라리 평범한 어염집 자식으로 태어났드라면..
그 얼마나 좋았을까? 그분의 삶을 되돌아보며 다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어찌해야 할까….


서강은 오늘도 말없이 묵묵히 흐르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애환을 실어나를까.

 

 

 

 

'문화산책 > 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조대 무인등대  (0) 2016.05.17
許筠(허균) 詩碑(시비)  (0) 2016.05.12
楊山齋(양산재)  (0) 2016.02.12
鮑石亭址(포석정지)  (0) 2016.02.11
경주 배리 석불 입상  (0) 2016.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