鮑石亭址(포석정지)

2016. 2. 11. 06:45문화산책/여러 종류의 민속자료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동 454-3
사적 제 1호

 

 

[포석정지 입구 전경]

 

[안내판 글 내용]

 

[鮑石亭址(포석정지) 전경]


1963년 1월21일에 사적 제1호로

지정된 이 포석정은 현재 경주 남산 서쪽 계곡의

포서계의 계곡가에 있다.


이 포석정일대를 城南(성남) 離宮址(이궁지)라고도 하는데,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는 別宮(별궁)을 가리키는 말로
이곳은 왕족과 귀족들의 놀이터 또는 南山神(남산신)을 위해 祭祀(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鮑亭址(포석정지) 주변 노거수]

 

신라 제 55대 경애왕은 재위 4년(997) 9월

포석정에서 견훤이 침공해 온다는 급박한 통보를 받고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한 후, 이곳 포석정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포석정은 결국 슬픈 비운이

담긴 역사의 현장으로 남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불시에 공격해온 견훤에게 왕과 왕비는 무릎을 꿇어야 했으며,
그후 10년이 못되어 고려에 완전히 항복하게 되었다.

 

 

[鮑石亭址(포석정지)]

 

천년 사직을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게 한 곳이라는 이유로
포석정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인식속에는 신라 종말의 모든 원인이
마치 이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포석정이 귀족들의

놀이터였다고 전해오나 그 위치가 남산성 바로 밑에 있으므로,

남산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다른 성격의 장소로도 짐작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鮑石亭址(포석정지)]

 

옛 중국의 名筆(명필) 王羲之(왕희지)가 浙江省(절강성)
會稽山(회계산) 북쪽 蘭亭(난정)에서 벗들과 함께 모여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지어 읊었으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3잔을 마시는 잔치를 한 고사를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라 말하는데,
이 놀이를 본따 돌로 전복처럼 수로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던 곳이 바로 포석정이라 한다.

 

 

[鮑亭址(포석정지)]

 

포석정 / 초아(박태선)


다 하지 못한
한과 슬픔
이제는 다 잊으셔요.


어쩌면 굴욕의 삶
잊기를 바랄지도 모르지만
진실은 묻히지 않으니까요.


죽음으로
잊힌 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여셨습니다.


그 옛날 그 영화
전설이 되어버린
마른 포석정 바라보며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통한의 삶


한 가슴 되어
절절했던 심정으로
얼싸안고 울어보렵니다.

 

 

 

[鮑石亭址(포석정지)]

 

젊은 花郞(화랑)들이 맑은 물과 바람을

즐기고 남자다운 기상을 배우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 남아 있는 돌로 된 물길은

流觴曲水宴(유상곡수연)을 즐기던 바로 그 곳이다.

 

 

[鮑石亭址(포석정지)]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돌거북의 입으로
물이 쏟아져서 돌 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이라 한다.


그 돌거북은 조선 말엽에 어느

 府尹(부윤)이 옮겨다가 자기집 정원에 놓아두었다
하기도 하고 자기 조상 비석 대석으로 사용 했다고도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鮑石亭址(포석정지)]

 

포석정 터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유흥을 즐기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경애왕의 슬픈 전설이 깃든 곳


지금은 물 없이 말라 그 형체만 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서 옛날의 일들을 다 알지 못하니
애달프다., 사라져간 옛일을 그 몇 사람이나 진정으로 슬퍼해 줄까.

 

 

[鮑石亭址(포석정지)]

 

49대 헌강왕(憲康王 876-886)이 포석정에

행차하셨을 때 남산의 神(신)이 임금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눈에는 神(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임금 자신이 神(신)이 추는 춤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춤이 유행되었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

 

 

[鮑石亭址(포석정지)]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

이후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雁鴨池(안압지) 해안선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돌을 마음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 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 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9세기초에 만든 것이라 믿어진다.

 

경주에 가면 어디를 가도 다 귀한 문화재들이다.


세계적인 여행지이자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으로 인정한 문화가 있는 곳
경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 같다.

 

 

[鮑石亭址(포석정지)]


십이영가 / 서거정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

생각에 잠겨 옛일을 돌이켜보네

 

유상 곡수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

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이미 옳지 못하네

 

함부로 음탕하고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쏜가

강개한 심정을 어찌 견딜까

 

가며가며 오릉의 길 ?조리며 지나노니

금성의 돌무지가 모두 떨어져버렸네  

 

서거정의 십이영가를 마지막으로

포석정지 답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