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雲書院(자운서원)

2016. 1. 23. 06:40문화산책/향교와 서원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번지
경기기념물 제 45호

 

 

[자운서원 정문인 紫雲門(자운문)]


紫雲書院(자운서원)은 이이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서원이다.

효종의 친필 사액으로 세워졌으며,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석학이요 천재라 할 수 있는 이이 율곡과
모친 되시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있고 묘지가 있는 곳이다.


이이 율곡선생과 모친 신사임당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도록
'자운서원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서원, 이이 율곡 가문의 묘소가 있어
두세 시간은 족히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교육적으로도 답사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라 할 수 있다.

 

 

[李珥先生(이이선생) 神道碑閣(신도비각) 전경]


파주시 향토유적 제 6호
이 신도비는 조선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선생의 아명은 現龍(현룡), 자는 叔獻(숙헌),
호는 栗谷(율곡), 石潭(석담), 愚齋(우재) 본관은 德水(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申師任堂(신사임당) 사에에서 출생했다.
처음 이름은 現龍(현룡)이었는데 11세 때 珥(이)로 바꾸었다.


명종 19년(1564) 생원시 식년문과에 장원한 이후
호조, 예조, 이조좌랑, 지평 등을 거쳐 부교리, 청주목사,
직제학,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소선 유학계의 李滉(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畿湖學派(기호학파)를 형성했고 특히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키는 經世的(경세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黨爭(당쟁)의 조정,
10만대군의 양성 및 大同法(대동법), 社倉(사창) 실시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文成(문성)이며 文廟(문묘)와 선조묘정에 배향되었고
자운서원외 전국 20여개 서원, 사우에 배향되었다.


이 신도비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李恒福(이항복)이 글을 짓고 申翊聖(신익성)이
글씨를 썼으며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 이다.

 

 

[神道碑閣(신도비각)]


사진은 자운문 들어서서 왼편 산위에 있는 율곡의 신도비각이다.
신도비엔 율곡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 사임당이 어느 날 꿈에 동해바닷가에 거닐고 있는데
바다 속에서 한 선녀가 살빛이 백옥같이 흰 옥동자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 율곡을 가졌다 한다.


율곡이 12월 26일 새벽 寅時(인시, 새벽 4시쯤) 강릉 북평촌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는데 율곡을 낳는 날 밤에도 어머님 사임당의 꿈에
어디서 난데없는 검은 용이 동해 바다로부터 날아오더니, 사임당이 자는 방
처마 밑 문 머리에 서려 있는 것이었다.


그 꿈을 깨어나자 곧 율곡을 낳았으므로, 아기 이름을
'見龍(현룡, 용이 나타남)'이라고 불렀고, 또 그 방을
'夢龍室(몽룡실, 용꿈을 꾼 방)'이라 불렀다.

 

 

[神道碑(신도비)]

 

[紫雲書院(자운서원) 전체전경]


인조 2년(1642) 시호를 文成(문성)이라 내리고,
숙종 8년(1682)에 문묘에 배향하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광해군 7년(1615)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이
고향인 율곡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紫雲書院(자운서원)을 세웠다.


자운서원은 栗谷 李珥(율곡 이이, 1536-1584)선생을 봉안한 서원으로
광해군 7년(1615) 창건되어 효종원년(1650)에 사액되었다.

 

 

[자운서원 삼문 전경]


숙종 39년(1713)에 선생의 후학인 사계 김장생(1548-1631)과
현석 박세채(1632-1695) 두 분을 추향하였으나,
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그 뒤 서원 터에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6.25 한국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0년 복원한 것으로 높은 대지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서 삼문 앞에 계단을 이용해 오르도록
설계되었다.


사당의 건물구조는 익공계 형식으로 처리되었고 지붕은 합각이다.
삼문은 양측 면을 박공으로 마감한 솟을 대문 모양이다.

 

 

[紫雲書院(자운서원) 솟을삼문 전경]


자운서원은 이율곡을 모신 서원(자운서원)도 있지만 경내엔

이율곡의 부모와 율곡부부, 큰 누이 매창 부부등의 가족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 신사임당 밑에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가 탄핵을 받기도 했는데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반대했던 대신들이 크게 통곡했다고 한다.

 

 

[안내판 글 내용]

 

[자운서원 솟을 삼문]


최근에 건립된 자운서원의 정문인 서원의 수문장 격인 솟을삼문이다.


파주는 율곡의 본가인 아버지 이원수와 강릉이 본가인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6세 때에

파주 율곡으로 와서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3세부터 29세까지

9번의 과거에서 9번 장원급제를 하기까지 어머님 문상기간과 금강산 수도의 4년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학문을 닦았고 벼슬길을 마친 말년에도 이곳에 돌아와
49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거주하였다.


율곡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루었던 '격몽요결'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講仁堂(강인당)]


삼일문을 들어서면 예절을 가르키는 강인당이 바로보인다.


유생들이 유학의 기본덕목인 '仁(인)'을 익히고 배웠을 講仁堂(강인당)
양 옆에 호위하듯 서있는 느티나무가 강인당의 품위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수양재 현판]

 

[修養齋(수양재)]


옛날 유생들이 생활하였을 동재와 서재


유생의 옷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그 옛날 선비들의 마음과 행동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선비가 되어보고 싶었다.

 

 

[立志齋(입지재)]


파주 율곡리는 덕수 이씨의 세거지였다.
특히, 이이가 율곡리라는 지명에서 호를 따 왔을 정도로
선생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미친 곳이다.


율곡은 현실적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성리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율곡이 이끌던 畿湖學派(기호학파)는 당시
이황선생의 영남학파와 함께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관직으로는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 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그가 주장한 십만양병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다.

 

 

[노거수]


일생을 자운서원과 함께 했을 늠름한 느티나무의 자태

서원의 영광과 상처, 아픔을 지켜보았을 것이며, 자운서원의

근위병으로 앞으로도 충실히 지켜갈것이다.

 

 

[강인당 뒤쪽에서 다시 노거수를 보고]


율곡은 여러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이때 성리학의 주요 관점은 이치와 기, 인간의 감정과 도리에 관한 것이 많았다.


45세때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기자실기'와 '경연일기'를 완성하고
왕에게 시무육조를 올리며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강인당과 묘정비 앞에서 인증샷]


대원군 시절에 철폐되었다가 뒤에 복원되었으나 6,25에 소실되고
1970년에 다시 세워진 자운서원에는 廟庭碑(묘정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율곡, 사계(김장생)의 기호학파를 확대개편하여 대학파를 이룩했던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의 찬란한 학문과 문장이 그 묘정비에 면면이
새겨져 있다


율곡학파의 뛰어난 계승자로서 기호학파의 대세력을 이룩한
우암의 문장 솜씨는 여기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율곡의 위대함도 유감없이 기술된 글이 바로 그 묘정비문이다.

 

 

[紫雲書院廟庭碑(자운서원묘정비)]


시도유형문화재 77호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이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박세채의 제사도 함께 지냈던 곳이다.


비문은 尤菴(우암) 宋時烈(송시열)이 짓고 글은 당대의 명필
谷雲(곡운) 金壽增(김수증)이 예서체로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이 썼다.

 

 

[紫雲書院廟庭碑(자운서원묘정비)]


자운서원에는 율곡과 신사임당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선생이 紫雲(자운)이라는 사액을 받은 건 사후 66년 후인

효종 원년(1650)이다. 

 

매년 10월 율곡문화제 때 제향을 올린다.

 

 

[文成祠(문성사)로 들어가는 삼문]


율곡 선생을 봉안한 문성사의 삼문


사헌부와 사간원, 승정원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외직으로도
나가 백성들의 삶의 모습도 직접 보며 보살폈다.


그 후 호조와 이조, 형조, 병조판서 등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과 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동인 측으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게 된다.


결국 율곡은 십만양병론을 주장한지 2개월 후인 같은 해 1583년 6월에
동인에 의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에게 교만을 부렸다'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첫째, 북쪽 변방지역에 오랑캐가 침입하여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을 때
병마를 모집하면서 왕의 재가없이 처리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전회의에 나가다가 어지러움 병이 발생해 회의에 나가지 못했는데
이것이 교만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이는 벼슬에서 물러나 선영이 있는 이곳에서 머물다가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이곳 선영에 묻힌 것이다.


10만양병설이 제기된후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文成祠(문성사)]


文成公(문성공)은 율곡 선생의 시호이다.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종 3년(1548)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29세때

응시한 문과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차례의 장원에 모두 합격하여

'九度壯元公(구도장원공)'이라 일컬어졌다.


퇴계 선생이 노력파라 한다면 율곡 선생은 엘리트라 할 수 있겠다.
두 선생의 만남은 율곡선생이 23세때 예안의 도산을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우측에서 담은 文成祠(문성사)]


29세때 호조좌랑직을 시작으로 여러 중앙관직경력과 넓은 식견으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동, 서 분당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어 삼사를 장악한 동인의 탄핵을 당하자 48세때 벼슬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 대사동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저서는 '성학집요','격몽요결','기자실기'등이 있다.

 

 

[약수터]


자운서원에서 서쪽 협문을 나오면 약수터가 있다.
물이 약이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자운서원 산책로를 걸어 내려왔다.


5만원권 화폐 인물로 신사임당이 최종 선정되자 화폐 도안 소재로
경기도 파주시 소재 자운(紫雲)서원이 주목을 받고 있다. 


5천원권 화폐 도안에는 앞면에 율곡 이이의 영정과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 뒷면에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들어가 있어 母子(모자)의 상징성을 모두 담고 있다.


따라서 5만원권 신사임당의 화폐 도안에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를 함께 모신
자운서원이 화폐 도안에 포함될 경우, 전 세계적으로 모자가 화폐 초상의
주인공이 된 전무후무한 사례로 남게 된다 한다.

 

 

[서원 뜰에서 인증샷]

 

율곡이 사직 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감회를 읊었던 시 한수를 올려봅니다.


求退有感(구퇴유감)


行藏由命豈有人(행장유명기유인)
사람의 행동거지는 운명에 의한 것
素志曾非在潔身(소지증비재결신)
깨끗하게 살기 위해 물러남은 아니라.


閭闔三章辭聖主(여합삼장사성주)
짧은 사임서를 올려 임금님의 곁을 떠나
江湖一葦載孤臣(강호일위재고신)
강호에 배를 띄워 갈대처럼 떠났네.


疎才只合耕南畝(소재지합경남무)
내 천성은 밭을 가는 것이 적합한 일이라

淸夢徒然繞北辰(청몽도연요북진)
마음은 부질없이 밭을 그리고 있네.


茅屋石田還舊業(모옥석전환구업)
초가에서 밭 갈며 옛 자세로 돌아가매
半生心事不憂貧(반생심사불우빈)
여생의 가난이야 걱정할 것 없어라.

 

 

[답사를 마치고 떠나며 또 한 컷]

 

율곡선생이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더 소개하며 소개를 마칠까합니다.

 

 

동문을 나서면서

 

하늘과 땅은 누가 열었으며

해와 달은 누가 갈고 씻었는가.

산과 냇물은 이미 무르녹아 어우러져 있고

추위와 더위는 다시 또 서로 갈리는구나.

우리 사람 만물 가운데서

지식이 제일 많도다.

어찌 조롱박이 되어

쓸쓸히 한 곳에 매여 있으랴.

전 세계와 온 나라 사이에

어디가 막혀 마음껏 놀지 못할까.

저 봄빛 짙어가는 산 천리 밖으로

지팡이 짚고 내 장차 떠나가련다.

나를 따를 자 그 누구인가

저녁나절 부질없이 서서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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