芬皇寺(분황사)

2015. 12. 19. 06:21문화산책/사찰 탐방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국보 제 30호

 

 

[분황사 안내팻말]

 

[芬皇寺(분황사) 출입구]

 

芬皇寺(분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普光殿(보광전) 전경]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세워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불교가 크게 중흥했던 신라의 전성기와 함께 한 사찰이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절이다.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華嚴經疏(화엄경소)', '금광명경소'
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神畵(신화)로 일컬어졌다.


원효 사망 후에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한다.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 이 소상은 고려 시대까지 분황사에 남아 있었으며,
일연이 '三國遺事(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 소상 :  정제한 점토로  만든  형상

 

 

[普光殿(보광전) 현판]

 

[普光殿(보광전)]


분황사의 芬(분)은 향기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皇(황)은 황룡사, 황복사, 황성사 등에서와 같이 신라왕실의
원찰을 의미하는 상징어이기도하며, 皇(황)은 임금을 뜻하는
임금 王(왕)과 같은 의미이므로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
이라는 뜻이라한다.


고려 말 몽골 제국의 침략과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지고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보광전 전각이다.

 

 

[입구쪽에서 본 芬皇寺石塔(분황사석탑) 전경]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이다.
석탑의 모양은 구운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전탑처럼 보이지만,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模塼石塔(모전석탑)이라 불린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基壇(기단) 위에 3층의 塔身(탑신)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芬皇寺(분황사) 삼문]


예전에는 이곳을 통하여 분황사로 들어왔으나,
현재는 주변 문화재(황용사지) 발굴로 패쇄되어있다.

 

 

[芬皇寺石塔(분황사석탑) 앞면]

 

[안내판 글 내용]

 

[石塔(석탑) 碑(비)]

 

[앞면 龕室(감실)입구와 仁王像(인왕상)]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芬皇寺石塔(분황사석탑) 전경]


탑의 각 부분에는 석문이 달린 감실이 있다.
東(동). 西(서). 南(남). 北(북) 방향으로 출입문을 만들어 놓았으며,
출입문 양쪽에는 금강역사를 새겨 놓은 인왕상이 있다.


감실은 불상 신주 또는 기타 여러 가지 물건을 봉안하기 위한
공간을 줄여서 龕(감)이라고도 한다.

 

 

[좌측에서 본 芬皇寺石塔(분황사석탑) 전경]

 

[좌측 龕室(감실)입구와 仁王像(인왕상)]


인왕상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악한 것이 사찰 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사찰의 문이나 전각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역활을 한다.


한 쌍이 배치되어 있는데, 한 상은 입을 벌리고 손에
금강저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고 다른 한 상은 입을 꽉 다물고
주먹으로 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뒷편 芬皇寺石塔(분황사석탑) 전경]

 

[뒷편 龕室(감실)입구와 仁王像(인왕상)]


통일전 신라의 섬세한 조각기술을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석탑 기단 4곳의 모서리에는 石獅子(석사자) 상을 조각해 세워 두었다.


네 방향에 위치한 사자는 보통 수호의 기능과 함께 부처님의 위의를 상징한다.
분황사탑의 사자상은 배치 방법에 있어서는 다보탑의 사자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한다.

 

 

[우측에서 본 芬皇寺石塔(분황사석탑) 전경]

 

[우측 龕室(감실)입구와 仁王像(인왕상)]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분화사 경내 석재들]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이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석재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분화사 경내 석재들]

 

[분화사 경내 석재들]

 

[석탑 동편의 碑(비) 전경]

 

[석탑 동편의 碑(비)]

 

[芬皇寺(분황사) 和諍國師碑趺(화쟁국사비부) 전경]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안내판 글 내용]

 

[和諍國師碑 碑石臺(화쟁국사비 비석대)]


화쟁국사비적은 원효의 비석을 받치던 비적으로 김정희의 글이 새겨져 있다.

 

 

[芬皇寺(분황사) 수도처]


신라의 향가 '도천수대비가'의 배경에는 분황사가 등장한다.
분황사에 걸려 있던 千手大悲(천수대비)의 그림에 영험이 있었다한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大願心 보살과 舍利塔(사리탑) 전경]

 

[대원심 보살과 사리탑 안내판 글 내용]

 

[大願心(대원심) 보살과 舍利塔(사리탑)]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안내판 글 내용]

 

[약사여래상이 있었다는 터]


경덕왕 14년(775) 本彼部(본피부)의 强古乃未(강고내미)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동상이 있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분황사 석정 안내판 글 내용]

 

[石井(석정)]


우물인 삼룡변어정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원성왕 때의
호국룡 이야기에서 무대가 되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  왔다고 한다. 그 뒤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이 우물은 외곽 바탕은 사각으로, 우물 외부는 팔각으로,
내부는 원으로 설계되어 철학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석정은 신라샘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초석의 규모로 보아 당시에는 대단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수 있다.

 

 

[大鐘閣(대종각) 현판]

 

[大鐘閣(대종각)]


분황사 대종각은 용도는 절에서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종.


사찰에는 사물이라는 소리를 내는 공양구가 있는데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다.


소리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구제해
보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한다.

 

 

[梵鐘(범종)]

 

[梵鐘(범종)과 木魚(목어)]


범종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은 '木魚(목어)'이다.
木魚鼓(목어고), 魚鼓(어고), 魚板(어판)이라고도 한다.


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비게 해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 법구로 銅鐘(동종), 金鼓(금고), 雲板(운판)과 함께
佛殿四物(불전사물)의 하나이다.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배 부분을 파내고
안쪽의 양벽을 나무채로  두들겨 소리를 내는 법구이다.

 

 

[大鐘閣(대종각) 전경]


초기에는 물고기의 모습에서  점차적으로  머리 부분만 용의
모습으로 변해 龍頭魚身(용두어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한다.


6세기에 먼저 지어진 황룡사와는 담을 맞대도록
바로 옆에 건축되어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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