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나들이 姜邯贊(강감찬)과 落星垈(낙성대)

2015. 11. 25. 06:29추천합니다/관광지와 휴게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4호

 

 

[낙성대 공원 입구와 안내판]


2010년 1월 4일 펄펄 내리는 눈속을 뚫고 낙성대에 들려볼까하고
길을 나섰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서 포기하였다.
눈이 내려 앞도 흐리고, 길도 미끄럽고 도로의 차들도 공해전만 윙윙
슬슬 미끄러져 내려오는듯도 하여 무섭기도 하고, 잘못 삐끗하여
여러사람 걱정을 하게 할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다음 날 5일 점심 후 하얗게 쌓인 눈위를 걸어서 낙성대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을 잊지 않기위해서 도로변의 큰 건물들을 눈여겨보면서...

 

 

 

여행공원이라기에 아하 여행하며 들리는 곳인가보다 하였더니,
간판의 글을 읽어보니 그게 아니네...재밋다.
女(여)성이 幸(행)복한 공원 女幸(여행) 공원이였다.^^

 

 

[낙성대 전통 혼례장 전경]


하얗게 눈 덮힌 전통 혼례장 닫힌 대문 양 옆의
청사초롱이 흰 눈 빛과 대조를 이루어 아름답다.

 

 

[매점과 화장실]

 

[낙성대 공원]

 

[낙성대 공원 입구]


눈 온 다음 날이라 그런지 인적이 끊긴 공원은 씽씽 바람만 불어대고
디카를 쥔 손이 시렸지만, 女幸(여행)공원에서 여성이기에 더욱 행복하다.

 

 

[눈 쌓인 벤취 풍경]

 

[강감찬 장군 동상]


姜邯贊(강감찬, 948년~1031년) 장군의 본관은 衿州(금주, 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어릴 때 이름은 殷川(은천). 三韓壁上功臣(삼한벽상공신) 弓珍(궁진)의 아들이다.


귀주대첩의 승리를 이끈 고려 시대의 명장이며, 문신.
문종 때에 守太師兼中書令(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仁憲(인헌)이다.


금주(현 서울 관악구 낙성대가 그의 출생지이다.)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강감찬 장군 동상]


고려의 명장 姜邯贊(강감찬) 將軍(장군)의 출생지로,
강감찬이 출생할 때 그의 집으로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落星垈(낙성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신비로운 기운을 받고 태어났지만, 키가 자라지 않았고,
얼굴도 못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성품은 곧고 지휘하는 능력이 뛰어나
늘 아이들의 대장을 도맡았다 한다.

 

 

[홍살문과 외삼문(안국문) 전경]


將軍(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것을

비롯하여 救國濟民(구국제민)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낙성대 안내판과 안내도]

 

[안내도]

 

[안내판 글 내용]

 

[눈 덮힌 낙성대 표석]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는 강감찬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즉 어느 날 밤 중국의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어느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찾아갔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으므로 데리고 와 길렀는데 그가 곧 강감찬이며, 뒤에 송나라 사신이와서
만나 보고는 文曲星(문곡성)의 化身(화신)임을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관리사무소]

 

[安國門(안국문) 현판]

 

[외삼문(안국문) 전경]


1973년 서울특별시에서 주변지역을 정돈하여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하여,
공원 동쪽에 사당을 지어 '安國祠(안국사)'라 하여 장군의 영정을 모셨으며
정면에는 외삼문인 安國門(안국문)과 내삼문을 세웠다.

 

 

[安國門(안국문)에서 본 내삼문]


문안에는 낙성대3층석탑을 강감찬 장군 생가 터에서

옮겨왔으며, 탑 맞은편에는 사적비를 세워놓았다.

 

 

[안국사와 내삼문 전경]


1973년~1974년에 걸쳐 409m의 담장을 쌓고,
영정을 모신 安國祠(안국사)를 지어 일대를 공원을 조성하였다.

 

 

[三層石塔(삼층석탑) 전경]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4호인 落星垈 三層石塔(낙성대 삼층석탑)


이 탑은 원래 강감찬장군이 태어나신 집터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한다.


한편 석탑이 있는 옛터에는 따로 遺墟碑(유허비)를 세워
由緖(유서) 깊은 事蹟地(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고려 강감찬 장군 사적비 전경]


장군의 偉業(위업)은 當代(당대) 국민의 흠모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장군이 태어난 집터에 舍利塔式(사리탑식)
三層石塔(삼층석탑)을 세우고, 그 자리에 큰 별이 떨어지던 날 밤
태어났다는 전설에 따라 落星垈(낙성대)라 이름하여 그 출생지를 표시하고,
거란의 침략적 야망을 근절시킨 장군의 공적을 찬양하였다.

 

 

[고려 강감찬 장군 사적비]

 

[내삼문]

 

[내삼문에서 본 안국사]


안국사는 고려시대 목조 건축양식의 대표하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따 세웠으며
팔각 청기와 지붕이 올려져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눈 덮힌 안국사 안뜰]

 

[安國祠(안국사) 현판]

 

[安國祠(안국사)]


서울특별시에서는 이곳에 넓은 터전을 마련하고
1973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석탑을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녹지와 공원시설을 갖추어 1974년 6월 10일 오늘의 낙성대가 조성되었다.


사당 안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강감찬 장군 영정]

 

[안국사 안뜰]


강감찬과 관련된 많은 설화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강감찬의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본 부인에게로 돌아오던 길에 만난 여우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되어
낳게 된 것이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그의 출생담은 흔히 始祖(시조)나 위인 등에서 나타나는 출생 설화와 일치한다.

 

 

[안국사에서 본 내삼문 전경]


또한 강감찬이 소년원님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가 너무 어리다고 얕보는
관속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에 다 집어 넣어보라고 하였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일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 넣으려 하느냐!"

호통을 쳐서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안국사 담장 너머로 본 삼층석탑]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석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어 탑안의 보물을
훔쳐갔다는 일화가 전해져오며, 탑뿐만이 아니라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언덕을 파내어 땅의 기운을 끊기도 했다한다.


이 탑에 연유하여 옛날에는 주변 마을을 탑골이라고 하였다.

 

 

[눈밭]


나라의 힘이 약하니 이런 수모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국력을 더욱 더 강하게 하여 다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겠다.

 

 

[三層石塔(삼층석탑) 전경]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900년이 넘도록 그를 추모하는
온 겨레의 마음은 낙성대와 더불어 連綿(연면)히 이어져왔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이 낙성대를 보호하기 위하여 1964년 석탑의 파손부분을 보수하였다.

 

 

[외삼문(안국문)에서 본 홍살문과 기념광장 전경]


강감찬에 관한 내려오는 이야기 중 또 하나...
어느 고을에서 여름날 개구리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관속에게
부적을 써주고 연못에 던지게 했더니, 그곳의 개구리가 다시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지역에서 전승된다.


또 그가 한성판윤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 백년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고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없이 해친다는
민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번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강감찬 장군 동상]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任軒覆試(임헌복시)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뒤 國子祭酒(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중추원사, 이부상서를
역임하였으며,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다.

 

 

[강감찬 장군 동상]


1018년에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70세의 나이로  上元帥(상원수)가 되어   興化鎭(흥화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우리나라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거란의 10만 군사 중 살아돌아간 자는 수천 명밖에 안되었다 한다.


그 후 강감찬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지냈다.
저서로는 '樂道郊居集(낙도교거집)', '求善集(구선집)'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낙성대 공원]


낙성대 근처에 서울 지하철 2호선의 낙성대역이 있어서,
대학교로 오해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낙성대학교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지만,
흔히 우스갯소리로 2호선상의 명문대를 거론할 때
낙성대를 말하기도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