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8. 05:59ㆍ뿌리를 찾아서/忠. 孝. 烈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 산1-1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95호
[안내판과 묘소 오르는 길 전경]
[묘역으로 가는 길]
주소가 있기에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네비에 찍어놓은 주소로 가자는대로
움직였지만, 엉뚱한 곳에 대려다 놓고는 안내를 종료한다나 뭐라나...ㅠ.ㅠ
[묘역 오르는 계단]
이럴땐 역시 그곳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께 여쭈어보는게 상책이다.
물어 물어 어찌어찌 도착하였다.
안내팻말을 갈림길쪽에라도 세워두었드라면 참 좋았을텐데...
묘가 있는 둔덕에 오르니, 나란히 3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차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申昉(신방)의 묘 전경]
申昉(신방, 1686-1736)은 신립의 6대손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
자 明遠(명원) 호 鈍庵(둔암) 相臣(상신) 琓(완)의 손자이며, 聖夏(성하)의 아들이다.
대사간.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문집으로 '屯菴集(둔암집)'이 있다.
[申昉(신방)의 묘]
숙종 45년(17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고, 이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둔암집'이 있다.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이 좌우로 한 쌍이 있고, 묘비는 없다.
[우측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 전경]
[좌측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 전경]
[申聖夏(신성하)의 묘 전경]
위에서 소개한 申昉(신방)의 아버지 申聖夏(신성하,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 成甫(성보), 호 和庵(화암). 아버지는 영의정 玩(완)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趙遠期(조원기)의 딸이다.
[申聖夏(신성하)의 묘]
숙종 30년(1704)에 참봉이 되고, 이어 현감을 거쳐 연안부사가 되었다.
돈녕부도정에 이르러 平雲君(평운군)에 봉해졌다.
문장이 뛰어났고 72세에 돌아가셨으며, 저서로는 '화암집'이 있다 .
[앞쪽에서 담은 묘비]
[뒤쪽에서 담은 묘비]
그가 지은 시 한 수를 소개합니다.
過恩津彌勒(과은진미륵)
彌勒童時曾識面(미륵동시증식면)
내 어릴 때 이미 부처님을 보았는데
今來默感浮生事(금래묵감부생사)
이제 와 산다는 게 뜬 구름임을 알겠네
人生悲歡四十年(인생비환사십년)
인생의 애환이 어느덧 40년이 지난 지금
[좌측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 전경]
[우측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 전경]
[申砬(신립)장군 묘 전경]
申砬(신립, 1546~1592) 朝鮮(조선) 宣祖(선조) 때의 武將(무장)
장군의 자 立之(입지) 諡號(시호) 忠壯(충장) 本貫(본관)은 平山(평산)이다.
조선명종 1년(1546) 생원 華國(화국)의 아들로 출생하여
선조조의 무장으로서 임진왜란(1592)때 충주에서 순국하였다.
선조 원년(1567)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도청부도사 경력을 지내고 진주판관이 되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로는 동자상, 망주석, 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申砬(신립)장군 묘비와 묘 전경]
조선 중기의 무신인 충장공 申砬(신립, 1546~1592) 장군의 묘이다.
신립은 선조 즉위년(1567)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16년(1583) 북방에 쳐들어온 여진족 나탕개를 격퇴시키는 등
여진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부터 6진을 지켰다.
[申砬(신립)장군 묘]
그 후 선조 20년(1587)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니 경상우 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기도 하였다.
북방 野人(야인)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특히 鐵騎(철기) 운용에 장기가 있었던 장수였다.
이러한 공로로 158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앞에서 담은 묘비]
묘비는 봉분의 좌측에 위치하는데, 총 높이가 224cm로 큰 규모이며,
加檐石(가첨석). 碑身(비신). 基臺(기대)로 구성되어 있다.
가첨석은 팔작지붕형의 형태로 지붕 부분에 龍(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기대의 측면에는 唐草紋(당초문)이, 상부 모서리에는 蓮花紋(연화문)이 장식되었다.
[뒤에서 담은 묘비]
비문은 宋時烈(송시열, 1607~1689)이 撰(찬)하고
申翼相(신익상, 1634~1697)이 글을 써서 肅宗(숙종) 29년(1703)에 건립한 것이다.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 전라, 경상의 3도 순변사로
임명되어,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며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남한강 지류인 達川(달천)에 투신 자결하였다.
[山神祭壇(산신제단)]
돌아가신 후에는 벼슬이 영의정으로 높여졌다.
봉분은 단분이며 부인 全州崔氏(전주최씨)와의 합장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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