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25. 06:17ㆍ문화산책/정자와 누각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411
전라남도 기념물 제 92호
[학포당 외삼문 과 뒷쪽 내삼문 전경]
조선 중종대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혜강공 학포 양팽손이 사용한 서재입니다.
현재의 건물은 학포선생이 쓰던 건물이 아니라 중간에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1920년 그 후손들이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안내판과 내삼문 전경]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85평이 넘는 경내에는 학포당 창건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老巨樹(노거수) 은행나무 1그루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학포당 안내판 글 내용]
[학포당 안내판 글 내용]
[학포당 내삼문]
화순군은 1994년 학포당을 보수하였고,
1995년 외삼문 복원과 담장 보수,
1996년 담장 설치, 1997년 담장 보수를 하였다 합니다.
1986년 2월 7일, 지방기념물 제92호로 지정했고,
지금의 소유자는 제주양씨 문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學圃堂(학포당) 현판]
[學圃堂(학포당)]
梁彭孫(양팽손, 1488~1545) 본관 濟州(제주) 자 大春(대춘). 호 學圃(학포).
趙光祖(조광조) 등과 함께 賜暇讀書(사가독서)를 하고, 1519년 校埋(교리)로
재직 중 己卯士禍(기묘사화)로 삭직되었으나 1537년 金安老(김안로)가
賜死(사사)된 뒤 復官(복관)되었다.
전남 능성현(현 능주) 월곡리에서 梁以河(양이하)의
아들로 출생하여 1545년 8월 18일 학포당에서 돌아가셨다.
[學圃堂(학포당) 윗쪽 다락 세살창]
학포당은 여느 정자와는 다른 구조를 보여준다.
건물 중앙에 방을 배치하고 그 주위 앞면과 양 옆면의
삼면에 툇마루를 내었는데 다시 가운데 방 뒤로 작은 골방이 있다.
게다가 위층에는 사방으로 세살창을 낸 책을 보관하는
높다락 다락까지 버젓이 있어 보는 이를 당혹케 한다.
일반적으로 쉼과 수양의 공간인 정자는 간단한 구조임에 비해
학포당은 여러 가지 저장과 갖춤의 공간까지 둔 실용성을 갖춘
살림집의 면모까지 일부 보인다.
건물의 특이한 생김새와 실용성에 눈길을 머물게 한다.
[노거수(은행나무)]
사람은 가고 그가 지은 집조차 퇴락의 길을 걸었지만,
그 집이 한 많은 주인이 서재를 지으면서 심었던 은행나무 한그루는
개혁가의 꼿꼿한 기개처럼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못 이룬 꿈을 이곳에서 시와 그림에
몰두하여 '산수도'와 같은 조선 문인화의 걸작을 남겼다.
그는 마침내 속세의 부귀 영화에 초탈한 몸과 마음으로
조선 문인화가의 한 사람이자 남종화의 시조로 우뚝 섰다.
[은행나무쪽에서 담은 학포당 전경]
조선 제11대 임금인 中宗(중종), 재위대에 文章(문장)과 書畵(서화)로 명성을 얻은 문신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尹斗緖(윤두서, 1668-1715), 말기의 許鍊(허련, 1809-1892)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데, 특히 양팽손은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지칭됩니다.
[좌측 기둥 주련]
사후 3백년 이상 지나 철종 14년(1863) 惠康(혜강)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지런하고 私(사)가 없으므로 惠(혜)라 하고
淵源(연원)이 流通(유통)하므로 康(강)이라 한다'는
뜻으로 한평생 일관된 삶의 태도와 성품을 잘 대변한다 합니다.
[우측 기둥 주련]
여섯 살 연상으로 1510년 생원시에 같이 등과한
趙光祖(조광조, 1482-1519)는 그와 평생 뜻을 같이한 知人(지인)인데, 그에 대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芝草(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人慾(인욕)을 초월한 사람’이라 묘사했다.
조광조의 유배당시 곁에서 함께한 이가 학포였고,
조광조가 타계하자 학포는 그의 捨身(사신)을 수습하였다 합니다.
[柱聯詩文由來(주련시문유래)]
[학포당 우측 옆 전경]
그의 문학적인 위상을 살필 수 있는 문집이 남아 있고,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언급은 中宗(중종) 12년부터
36년까지 25년 동안 40여 회에 이른다 합니다.
[학포당 우측 뒷쪽에서 담은 내삼문 전경]
寒微(한미)한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이 두드러졌고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벗들이 그의 촌스러움을 헐뜯었다고 하나 강직함이
익히 알려져 있었다 합니다.
[학포당 우측 뒤 담 앞 비석 전경]
[학포양선생학포당유지추모비]
[노거수(은행나무)]
나무의 줄기는 이미 다 썩었지만, 줄기 주변에서
새로 자라나 8갈리로 나뉘어 한 나무인것처럼 자라고 있다.
굵게 자란 여덟 개의 줄기는 이 나무를 심은 양팽손의 여덟 아들을 상징한다
고 하기도 하며, 원둥치가 꺾이고 썩은 것은 이상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쓰러진 양팽손의 생애를 고스란히 닮은 모습이라고도 전해져 내려온다.
[노거수(은행나무)]
중종 14년 (1519) 校理(교리)로 재직중에 己卯士禍(기묘사화)로
사직되었으며,1521년 사화가 또 발생하자 은거의 뜻을 굳히고 학포당을
건립하여 講學(강학)과 詩畵(시화)로 세월을 보냈다.
[내삼문쪽에서 담은 외삼문 전경]
기묘사화로 죽음을 맞이한 조광조의 시신을 비밀리에 거둔 양팽손은
사화 이후의 세월을 학포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시화에 몰두하며 지냈다.
그러나 실패한 개혁가의 자취여서인지 이후 학포당은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다.
한 때 학포당은 흔적도 없이 퇴락했는데, 훗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원형대로 복구에 오늘에 이르렀다.
[외삼문쪽에서 담은 내삼문과 골목길 전경]
글씨를 잘 썼으며, 吏曹判書(이조판서)에 추증.
綾州(능주)의 竹樹書院(죽수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에 '學圃遺集(학포유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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