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8. 07:21ㆍ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대북리 357
[절강장씨시조 張海濱(장해빈) 墓所(묘소) 전경]
마을 입구 북산서원 표지판에 있는 건너편 둔덕위에 있는 묘소를 찾지 못하여
마을 안길 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오며 마침 경운기를 몰고 나오시는 분께
여쭈었더니, 앞서 갈태니 뒤따라 오라고 하셔서 그분의 도움으로 들려보게 되었다.
참 고마우신 분 감사의 인사를 드리긴 하였지만, 이곳을 빌어 다시 한번 더 감사를 드립니다.
[恭人月城金氏之墓(공인월성김씨지묘)와 뒤 전경 전경]
시조 묘소 맨 아랫쪽에는
[處士浙江張公諱敬言之墓(처사절강장공휘경언지묘)와 뒤 전경]
[處士浙江張公諱敬言之墓(처사절강장공휘경언지묘)]
묘 앞 상석아래에는
[通德郞鷗峯張公之墓(통덕랑구봉장공지묘)와 뒤 전경]
인터넷 검색 결과 2세 묘라 합니다만, 상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墓碑(묘비)] 通德郞鷗峯張公之墓(통덕랑구봉장공지묘)
[墓碑(묘비) 뒤면]
[通德郞鷗峯張公之墓(통덕랑구봉장공지묘)]
[崇祖表石(숭조표석)]
어느분의 묘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묘 앞에는
恭人月城金氏之墓(공인월성김씨지묘)
夫君浙江張公諱德信墓(부군절강장공휘덕신묘)라 적혀 있었다.
處士浙江張公諱敬言之墓(처사절강장공휘경언지묘)라 적혀 있었다.
인터넷 검색 결과 3세 묘라 합니다.
恭人豊山柳氏祔(공인풍산유씨부)
[절강장씨시조 張海濱(장해빈) 墓(묘) 전경]
浙江張氏(절강장씨) 始祖(시조) 始祖(시조) 張海濱(장해빈)은
中國(중국) 浙江省(절강성) 杭州(항주)의 屬縣(속현)인 吳江縣(오강현)
사람으로 漢(한)나라 丞相留侯 張良(승상유후 장양)의 後孫(후손)이다.
선조 7년(1575) 태의감 應華(응화)의 아들로
명나라 항주도 금화부 烏江縣(오강현)에서 태어났다.
[墓碑(묘비)]
선조 30년(1597) 나이 23세때 정유재란 유격대장
吳惟忠(오유충)과 함께 左翼將(죄익장)으로 조선지원군으로 참전했다.
충주와 죽산에서 싸울 때 선두에 서서 많은 적의 목을 베고
승리하니 전승비가 세워졌으나 안타깝게도 적탄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공은 아픈 몸을 돌보기는커녕 계속 출전하여 울산
증성(甑城)싸움에서도 많은 적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부상을 입게 되었다.
[墓碑(묘비) 뒤면]
전쟁이 종료되고 같이 왔던 오(吳) 유격장 등이 귀국할 때
공은 전쟁에 다친 상처가 아물지 않아 몸이 아프고, 조국 명이
망할 것 같은데 비해 조선의 미풍양속이 마음이 들어 이곳 군위군
북산리 외진 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회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 회화나무가 현재 북산서원내에 있는 회화나무라 합니다.
[묘비 옆 봄꽃(양지꽃)]
공의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던 조정에서는 惠民署(혜민서) 참봉과
다시 율봉도 찰방을 제수했으나 엄숙히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검소하게 살며 고을의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즐겼다.
의령 남씨를 맞아 5남 1녀를 두어 당대 내외손이
무려 100여명에 이르니 모두들 中華(중화)마을이라 했다.
[절강장씨시조 張海濱(장해빈) 墓(묘)]
공은 신장이 9척이고 말 타기를 좋아했으며,
천문지리, 관상 보는 법, 의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고을의 수령과 안동부사가 괴질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을 때
치료하니 명성이 원근에 알려지면서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으나
모두 고쳐주었다고 한다.
귀화는 하였지만, 고국 명나라를 잊지 못해 뒷산에
대명단을 쌓고 황제기일에는 서쪽을 향해 절했다고 한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효종 8년(1657) 돌아가시니 향년 82세
숙종 10년(1684) 사림의 공의로 북산서원에 제향되었고 영조 27년(1751)
왕명으로 후손들의 부역이 면제되었다.
고종 29년(1892)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 훈련원사에
증직이 내려지고 같은 날 부인 의령 남씨가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절강장씨시조 張海濱(장해빈) 墓所(묘소) 전경]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는지
시 한편을 남겼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三十年間風異土(삼십년간풍이토)에
삼십년간이나 이역 땅에서 세월만 보냈는데
八千里外月同輝(팔천리외월동휘)라
팔 천리나 떨어진 저 달빛은 한결같이 다 같구나
華音已變明?弊(화음이변명구폐)하니
고향나라 소식도 끊어지고 고향의 의복 풍속 다 변했으니
誰識楊江舊布衣(수식양강구포의)오
돌아간들 그 누가 나를 절강 사람으로 알아주리오.
그의 후손들이 군위에 세거해오면서 시조의 출신지인 절강을 본관으로 삼아왔다.
역사상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은 없지만, 약 400년 동안 3천여 명의 자손을 번창시킴으로써
임진왜란 때 귀화한 성씨 중에서는 비교적 大姓(대성)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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