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12. 06:08ㆍ뿌리를 찾아서/묘역 답사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34 은석동 (칠보면 원촌1길 140)
[재실(영모재) 전경]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賞春曲(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의 묘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다해서 찾아 나섰다.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무성서원은 잘 알아도 무성서원에서 가까운
정극인 무덤까지는 잘 찾지 않지만, 풍수를 하는 남편덕에 불우헌 정극인 묘까지 들리게 되었다.
[재실(영모재) 솟을 삼문]
새벽일찍 출발해서 달려왔는데, 행여,
닫혀 있을까 조마조마 활짝 열어둔 대문이 반갑다.
[永慕齋(영모재) 현판]
정면에서 담은 永慕齋(영모재)]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賞春曲(상춘곡)'을 비롯하여 '不憂軒歌(불우헌가)', '不憂軒曲(불우헌곡)'
등을 지은 불우헌 丁克仁(정극인 1401~1481)을 기리는 영모재이다.
[솟을 삼문에서 담은 우측 협문]
아마도 저 문 뒤쪽 건물이 관리인이 사시는 집인듯 합니다.
[묘소로 통하는 좌측 협문]
협문은 닫혀 있지만, 저 문을 열고 나서면 묘소로 연결되는 문인듯...
[좌측에서 담은 영모재 전경]
누군가 관리를 하고 있는듯 재실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보는 제 맘도 흐뭇하고 좋았습니다.
간혹 허물어져 가는 재실을 보면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묘소로 가는 길 담밖에서 영모재]
닫힌 문을 열고 나올 수도 있지만, 활짝 열어둔 솟을 삼문이 있기에
그곳을 통하여 담을 끼고 돌아 묘소로 향하며 담아 본 담 너머 영모재 전경
[묘 앞 쉼터]
[안내판 글 내용]
[불우헌 정극인 묘역 전경]
[안내판 글 내용]
[불우헌 정극인 묘 전경]
울창한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묘역은 편안해 보였다.
묘 앞으로는 상석, 묘비,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불우헌 정극인 묘]
본관 靈光(영광). 자 可宅(가택). 호 不憂軒(불우헌), 茶軒(다헌), 茶角(다각).
대대로 벼슬을 하던 영광 정씨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곤은 창신교위 충무시위사 중령 부사직(창신교위 충무시위사 중령 부사직)의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는 죽산 안씨로 개성부 소윤을 지낸 정의 딸이었다.
[墓碑(묘비)]
다른곳과 달리 묘 앞에는 묘비 3기가 세워져 있는데,
묘앞에 한기, 묘 좌우로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묘 좌측 묘비]
[묘 우측 묘비]
[좌 우측 문인석]
[묘앞 장명등 옆과 앞 전경]
장명등에 새겨진 문양이 톡특하여 정면과 옆 모습을 담아 보았습니다.
4방 다 다르게 새겨져있었지만, 두면만 담아 소개합니다.
[좌우 망주석]
망주석 역시 다른 곳과 달리 8각으로 되어 있었으며,
위쪽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게 조각이 되어 있기에 담아왔습니다.
[불우헌 정극인 묘]
세종 11년(1429) 생원이 된 후 여러 번 과시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세종 세종 19년(1437)세종이 興天寺(흥천사)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太學生(태학생)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北道(북도)로 귀양을 갔다.
[우측에서 담은 불우헌 정극인 묘 전경]
그 뒤 풀려나 泰仁(태인)으로 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의 이름을 불우헌이라고 지었다.
불우헌 앞 泌水川(비수천)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으로 鄕約契軸(향약계축)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좌측에서 담은 불우헌 정극인 묘 전경]
정읍 칠보 지역으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가사와 단가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마을의 자치규약인 고현향약(태인 고현동 향약, 보물 제1181호)을 만들었다.
[불우헌 정극인 묘에서 담은 뒤쪽 부인 묘 전경]
문종 1년(1451)에 천거를 받아 6품 벼슬인 廣興倉副丞(광흥창부승)이 되었고,
이어 仁壽府丞(인수부승)이 되었으며 단종 1년(1453) 당시 한성 판관이었던
成順祖(성순조)의 권유로 殿試(전시)에 응시하여 金壽寧榜(김수령방) 丁科(정과)
13명에 들었고, 全州府敎授參賑事(전주부교수참진사)가 되었다.
[불우헌 정극인 정부인 구고 임씨 묘]
문종 1년(1451)에 천거를 받아 6품 벼슬인 廣興倉副丞(광흥창부승)이 되었고,
이어 仁壽府丞(인수부승)이 되었으며 단종 1년(1453) 당시 한성 판관이었던
成順祖(성순조)의 권유로 殿試(전시)에 응시하여 金壽寧榜(김수령방) 丁科(정과)
13명에 들었고, 全州府敎授參賑事(전주부교수참진사)가 되었다.
[정부인 구고임씨 묘비]
묘비에는
贈貞夫人九皐林氏之墓(증 정부인 구고임씨지 묘)라 새겨져 있다.
[정부인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수양대군이 자기 조카였던 단종의 왕위를 차지하고
즉위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다시 태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해 12월에 조정에서 仁順府丞錄(인순부승록)으로서
佐翼原從功券(좌익원종공권) 4등을 내려 다시 관직에 올라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宗學博士(종학박사)를 지냈고, 사헌부감찰 및
通禮門通贊(통례문통찬) 등을 역임했다.
[정부인 묘 앞에서 담은 불우헌 정극인 묘 전경]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성종 1년(1470)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태인으로 가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2년 뒤 벼슬에 뜻을 접고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三品散官(3품산관)이 내려지자
이에 감격해 '不憂軒歌(불우헌가), '不憂軒曲(불우헌곡)을 지어 송축했다.
[불우헌 정극인 묘 앞에서 담은 재실쪽 전경]
성종 12년(1481)년에 81세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사후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고,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공직자로서 눈에 띌 만한 업적을 이룬 바는 없었으나
선비로서 청렴한 삶을 고수했고,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문학적 소양이 매우 뛰어나,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短歌(단가)인 불우헌가, 翰林別曲體(한림별곡체)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문학사에 큰 공헌을 했으며, 不憂軒集(불우헌집)이라는
2권 1책 분량의 문집을 남겼다.
[다시 담아 본 재실 전경]
賞春曲(상춘곡)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가
옛사람 풍류를 미칠가 못 미칠가
천지간 남자 몸이 날만 한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악을 모를 것가
수간모옥 벽계수 앞에 두고
송죽 울울 속에 풍월 주인되여셔라
엇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묘화는 석양 속에 피어있고
녹양방초는 세우중에 푸르도다
칼로 말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조화신공이 물물마다 헌사롭다(이하략).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어찌하리'로 끝나는 이 시는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힌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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